크레타 문명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 고대 문명이 발달하고 있었던 기원전 3000년기와 2000년기 동안에 지중해의 크레타 섬에는 다른 또 하나의 문명이 성장하여 점차 에게해의 여러 섬과 그리스 본토, 그리고 소아시아의 서부지역에 전파되고 있었다. 그러나 약 1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문명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다. 크레타의 미노스 왕에 관한 전승이나 트로야 전쟁의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는 대체로 신화나 서사시인들의 공상으로만 여겨져 왔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후엽부터 그러한 신화나 서사시에 이끌린 몇몇 학자들의 발굴과 연구를 통해서 그것들이 한낱 허구만은 아니고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라는 점이 밝혀지게 되었다.
에게 문명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발달한 크레타 문명은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즈의 발굴과 연구의 결과로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따라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불리는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3000년기 중엽에 청동기시대에 들어선 것으로 보이는데, 그 전성기는 기원전 2000년부터 1500년경까지였다. 소아시아 지방에서 이 섬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짐작되는 크레타인들은 그리스 본토보다는 오리엔트 지역과 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문화는 오리엔트 문화와 비슷한 점을 갖고 있으면서 독자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국왕 미노스는 이집트의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지배자로 군림했으나 군사적 정복자는 아니었다. 국왕은 오히려 국내 최대의 자본가요 사업가로서 그의 권력은 공업생산과 교역을 통해서 획득한 부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크노소스의 궁전은 그의 부가 얼마나 강대했으며 그들의 생활수준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잘 보여 준다. 거창하고 복잡하며 화려하고 편리한 이 궁전은 단순한 허구만은 아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일반 주민들의 생활 또한 고대 오리엔트의 어느 주민들보다 자유롭고 유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예제도가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계층 간의 차별이 심하지는 않았으며 여자도 남자와 거의 평등했다. 크레타에는 여자 투우사나 여자 권투사가 있을 정도였다.
미케네인의 침입
크레타인들의 활달한 기풍과 섬세한 감각, 정교한 솜씨는 그들이 만들어 낸 도기와 벽화에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은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저장하기 위해 커다란 항아리를 만들었는가 하면, 달걀껍질 두께의 얇은 도기를 만들고 그 표면에 동식물의 생동적인 모습을 그려 넣었다. 그들은 상아나 도기로 날씬한 여신상을 만들고 금은 세공 등 정교한 공예품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그림은 크레타 제일의 예술이었다. 주로 벽화로 남아 있는 그림들은 그들의 자유롭고 활달한 율동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문명이 발달했던 크레타섬의 여러 도시는 기원전 18세기 말 이래로 지진이나 해일, 외부의 침입 등 몇 차례의 참화를 겪었다. 그중에서도 기원전 15세기 중에 있었던 대참화는 그리스 본토에 거주한 미케네인들의 침입에 의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1952년 영국의 건축기술자 벤트리스가 크레타의 선문자 B를 해독함으로써 한층 더 분명해졌다.
크레타섬에 침입하여 그 문화를 파괴한 미케네인들은 기원전 2000년 무렵 그리스 본토에 침입해 온 인도-유럽어계의 주민들이었다. 이때 이곳 원주민들은 이미 청동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새로운 침입자들은 처음에는 이 원주민의 문화를 파괴했으나 점차 이들과 섞여 그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전성기 크레타 문명에 접하게 되자 이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전사적 성격을 유지함으로써 최초의 그리스 문화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들 특유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미케네 문명
기원전 1600년경부터 세력이 강성해진 이들은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각지에 여러 왕국을 세웠다. 그중에서도 미케네가 가장 부강하여 이들 여러 왕국의 맹주 격이었다. 호메로스가 그의 서사시 『일리아스』에서 ‘황금의 미케네’라 불렀던 미케네의 부강이 실제로 밝혀진 것은 트로야 유적의 발굴과 성공한 독일의 실업가 하인리히 슐리만이 웅대한 미케네의 성곽과 황금보물 등으로 가득 찬 원형 묘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그의 발굴로 인해 기원전 16세기 이래 융성했던 미케네 문화를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미케네인들은 해안에서 약간 떨어진 언덕 위에 견고하고 웅장한 성채를 구축했다. 성채는 거석을 쌓아 올린 이른바 ‘키클로프스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 돌이 어찌나 큰지 전설상의 거인 키클로프스가 쌓아 올린 것이라 해서 그렇게 불린 것이다. 미케네의 지배자들이 이처럼 거창한 성곽을 세울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들의 부나 권력이 강력했음을 보여 준다. 국왕은 대토지 소유자로 많은 가축과 노예를 소유했다. 그들은 관리와 서기를 거느리고 여러 촌락 공동체로부터 각종 공납품을 징수했다. 이처럼 미케네의 왕권은 본질적으로 오리엔트 전제국가의 그것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오리엔트의 전제군주권에 비해 포도와 올리브 생산 등 집약농업과 목양이나 양돈 등 목축에 기반을 둔 미케네의 왕권은 그 힘이나 규모가 훨씬 작은 것이었다.
미케네가 누린 부의 또 하나의 원천은 교역 활동에 있었다. 특히 크레타의 여러 도시를 파괴한 이후 미케네인들은 크레타인 대신 동부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고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 진출하는 등 에게해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트로야 전쟁은 이러한 미케네인들의 세력 팽창 역사를 잘 나타내주는데, 학자들은 이 전쟁이 기원전 13세기 중엽에 실제로 일어났다는 데 대체로 합의하고 있다. 트로야 성에 대한 공략이 있은 지 얼마 후부터 동부지중해 세계에는 일리리아인들과 트라키아인들의 동방 진출, 그리고 소위 ‘바다 사람들’의 침입 등으로 말미암아 일대 동란기를 맞았는데, 미케네 또한 이 커다란 물결에 휩쓸리게 되었다. 특히 북쪽에서 새로운 그리스인의 일파인 도리아인들이 남하해 옴에 따라 미케네의 여러 왕국들이 이들에게 정복당했다. 이후 그리스 세계는 약 300년 동안 이른바 암흑시대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