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의 생활방식
그리스의 폴리스 철저한 민주정으로 나아간 폴리스가 있었는가 하면 초기 귀족정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폴리스도 있어, 제각기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자기에게 알맞은 제도를 받아들였다. 아테네는 전자의 대표적 경우이고 스파르타는 후자의 대표적 보기였다.
도리아인들이 선주 그리스인들을 정복하여 세운 폴리스였던 스파르타에서는 시민들이 선주민의 대부분을 헤일로타이라는 노예로 삼아 시민들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고 그 수확물을 공납으로 바치게 했는데, 이들의 신분은 중세의 농노와 비슷했다. 스파르타에서는 이들 헤일로타이 이외에 페리오이코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종속민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상공업에 종사했으며 자유민으로서 군역의무가 있었으나 참정권은 없었다. 스파르타인은 이처럼 압도적 다수의 종속민 위에 군림한 지배계층이었다. 이처럼 소수의 스파르타인이 다수의 종속민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으며, 이 같은 필요에 의해서 군국주의적인 스파르타의 생활방식이 탄생한 것이다.
스파르타에는 두 사람의 왕이 있었으나 행정의 실권은 1년 임기로 선출된 행정관인 5명의 에포로이에게 있었다. 시민들의 회의로서는 민회와 원로원이 있었는데, 원로원은 법안의 제안권과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민회는 법안의 표결권과 공직자의 선출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스파르타에서는 행정의 실권은 에포로이에게, 입법의 실권은 원로원에게 있었으나 최종적인 결정권은 역시 전 시민의 모임인 민회에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귀족정과 민주정의 혼합체제야말로 스파르타의 두드러진 특징이었으며, 당대의 많은 그리스인들에게 아테네 국제보다는 오히려 스파르타가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된 까닭 또한 여기에 있었다.
스파르타의 군국주의적 특성은 그들의 생활방식 속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전체 시민들을 전사화 하려고 했던 스파르타에서는 모든 시민생활을 병영생활화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약한 아이를 산에 버리고, 어렸을 때부터 집단생활을 하게 하고, 소박한 생활에 익숙하게 하고, 용감성과 기민성, 인내심과 책임감 등 전사로서의 덕목을 기르기 위해 심지어 도둑질이나 암살까지도 명령하는 이른바 스파르타식 교육, 20세부터 60세까지의 군복무 의무, 전 시민의 공동식사 등 이 모든 것들이 스파르타가 전체 시민들을 훌륭한 전사단으로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공동체를 지키고 종속민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아테네와는 달리 스파르타에는 성벽이 없었는데, 스파르타의 전설상의 입법자 뤼쿠르고스는 “벽돌이 아니라 남자들로 성벽을 쌓은 도시는 훌륭한 성벽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한다. “성벽은 바로 사람이다”라는 이런 생각이야말로 전사들의 공동체 국가적인 진면목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이었다.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중장보병의 팔랑크스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 스파르타가 군국적인 사회체제를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했던 것도 이런 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아테네의 정치체제
이보다 더 민주적인 국제와 더 자유로운 사회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던 아테네에서도 성립 초기의 정치체제는 귀족정이었다. 스파르타에서와 마찬가지로 행정을 맡은 아르콘과 원로원인 평의회와 민회가 있었으나 정치의 실권은 역시 귀족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도리아인의 원주민 정복에 의해 성립된 농업 위주의 폐쇄사회였던 스파르타와는 달리, 아티카 지방 부족들이 자주적으로 통합한 폴리스로서 농업 이외에 일찍부터 상공업이 발전한 개방사회였다. 이러한 아테네에서는 식민활동에 따른 무역의 발전과 화폐경제의 발달로 부유한 상공업자층과 부유한 농민층이 탄생했는데, 이러한 부에 의한 그들의 무장 능력은 군사적 역할을 증대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역할의 증대는 당연히 그들의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시키게 되었다. 한편 이런 발전의 그늘 아래서 농민중에는 흉작이나 부채 때문에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지는 자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귀족과 평민 간의 대립이 점차 심화되어 갔다. 아테네에 조정자와 참주가 나타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조정자 솔론은 부채를 말소하고 이후 신체를 저당으로 하는 대금을 금지했으나, 기존의 국제나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유명한 개혁인 재산평가정치는 그것으로 계층구조를 변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네 시민 계층의 재산정도에 따라 그들의 참정권과 군사의무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조정자였던 솔론은 귀족과 평민 중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도리어 양쪽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솔론이 물러나자 아테네에서는 또다시 시민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 틈을 타서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자가 나타났다. 이것이 곧 참주였다.
기원전 6세기중엽 ‘곤봉잡이’라는 친위대를 이용하여 참주로 등장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빈민구제에 힘쓰고, 대토목공사를 일으키고, 공공건물을 세우고, 대규모의 국가적 제전을 마련하고 상공업을 장려하는 등 민중에 영합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의 시대는 오히려 선정의 시대로 지목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인 근본목적은 자신의 독재권의 유지 강화에 있었고, 특히 그의 사후 그의 아들 히피아스가 잔학한 폭군이 되자 민중이 일어나 참주정을 무너뜨렸다.
아테네의 민주화 개혁
그 후 아테네에는 또다시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표면화되었으나 결국 평민 측의 클레이스테네스가 정권을 잡게 됨에 따라 아테네의 민주화 개혁이 크게 진전했다. 그의 개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부족제의 개편이었다. 그는 귀족적인 씨족에 바탕을 둔 종래의 4개의 혈연부족 대신에 데모스를 근간으로 하는 10개의 지연 부족을 만들어 냄으로써 귀족정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민주정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러한 부족개편에 따라 종래의 네 부족에 기반을 둔 400인회 대신에 각 부족마다 50명씩 파견되는 평의원으로 구성된 500인회가 새로운 평의회로 탄생하여 중요 정무를 처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부족제의 기반이 최하의 행정단위였던 데모스에 있었다는 점이다. 즉, 각 부족을 대표하는 50명의 평의원은 이들 각 데모스에서 선출된 대표 중에서 추첨으로 뽑힌 자들이었다. 데모스에는 구민명부가 비치되어 있었는데, 데모스의 제반사는 이 구민명부에 등록된 구민들의 자치에 맡겨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구민명부가 곧 아테네의 민회 출석 자격자명부, 즉 아테네 시민명부이기도 했다. 부족제의 개편으로 아테네 정치의 실권이 종래의 씨족제 귀족의 손에서 이러한 구민의 손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리하여 아테네 시민은 이제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라는 가문을 내세우는 종래의 호칭 대신에 ‘어느 구의 아무개’라는 구를 내세우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란 바로 이러한 데모스를 기반으로 하는 데모스의 정치였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이와 같은 민주정의 발전은 어디까지나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의 일이었다. 스파르타의 페리오이코이나 헤일로타이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테네에서도 재류 외국인이나 노예에게는 시민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다만 아테네의 노예는 경작노예였던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와는 달리 돈으로 사들인 가내노예와 광산노예였다. 후에는 수공업에서의 노동력이나 공공사업에도 노예가 사용되었는데, 해외무역의 발전과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 노예의 수가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