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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유럽의 봉건제도의 특징

by kraneco 2024. 11. 5.

유럽의 봉건제도

 유럽은 4세기 말엽부터 10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약 600여 년 동안 내부의 분열과 외부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혼란과 무질서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요청된 것은 안전의 보장과 질서의 유지였다. 그것은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이웃에 대한 방어의 문제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력을 갖춰야만 했으며, 그렇지 못한 자는 힘센 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각지에 무력을 가진 자들이 대두하여 이들이 그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 사실상의 지배자가 되었다.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지배하고 법과 질서가 유지될 수 없는 폭력적인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이들 무사들의 지배체제로 서서히 자라난 것이 바로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였다.

 봉건제도는 이처럼 각 지방에서 거의 자생적으로 성장한 것이기 때문에 그 지방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말의 정의는 물론 그 기원이나 특징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많아 이를 요약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면서도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부독일과 잉글랜드 등지에 형성된 유럽 봉건제도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도 많아서 그 특징을 몇 가지 측면에서 간추릴 수 있다. 유럽 봉건제도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하나의 군사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라의 법이나 질서가 유지되지 못한 혼란상태에서 무력을 가진 자들은 일종의 사적인 도당을 형성하여 그들의 세력을 폈다. 그 도당의 우두머리를 주군이라 하고 그의 종자를 봉신이라 했다. 이러한 주군과 봉신 사이의 종속관계를 주종제라 했는데, 주종제라는 이 군사제도야말로 봉건제도의 핵심을 이루는 관계였다. 주종제는 게르만의 종사제 혹은 로마의 피보호제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기원이야 어떻든 카롤링 시대에 이르면 자유민들 중에 자신의 안전과 생계를 위해 유력자에게 몸을 의탁하고, 그 대신 그에게 일정한 정치적 혹은 군사적 봉사를 하는 자가 나타났다. 이렇게 유력자에게 탁신한 자가 곧 봉신이요, 그 유력자가 바로 주군이었다. 이때 봉신은 그 봉사의 대가로 주군에게서 으레 토지를 받게 마련이었다.

은대지제와 주종제

 카롤링 시대에 국왕에게 봉사한 봉신은 봉사의 보수로서 국왕의 토지를 대여받아 그 토지에서 얻은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토지를 은대지라 했는데, 이 말은 차츰 봉이란 말로 대체되어 갔다. 이리하여 봉이란 일정한 봉사, 특히 군사적 봉사의 대가로 봉신에게 주어지는 토지대여를 말하는 것이었으며, 주종제란 게르만의 종사제가 이러한 은대지제와 결합하여 형성된 하나의 군사제도였다. 군사제도로서의 이 주종제야말로 유럽 봉건제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주종제에 입각한 봉건적 군신관계는 봉신이 신서와 충성의 예식을 주군에게 드린 후 주군이 그에게 수봉의 절차를 베푸는 것으로써 성립되었다. 이렇게 맺어진 군신관계는 쌍무적인 계약관계였다. 봉신은 주군에게 봉사와 조언 그리고 부조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봉사는 주로 주군과 함께 싸움에 나가는 일이었고, 조언은 주군의 궁정, 즉 법정에 참석하는 일이었으며, 부조는 주군의 장자의 기사서임이나 장녀의 결혼 때의 부조, 주군이 포로로 잡혔을 때의 몸값의 부담 등 재정적 원조였다. 이에 대해 주군에게는 봉신을 보호하고 부양할 책임이 있었다. 봉신에 대한 신체적 가해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것은 물론, 봉신이 재판을 받게 될 경우 그를 비호해 주어야 했다. 봉신에 대한 부양의 방법으로는 주군의 집안에서의 직접 부양도 있었으나 대개는 봉신에게 봉을 주었다. 그것은 보통 토지대여였으며 이것이 곧 봉토였다.

 주종제에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이들 주군과 봉신이 모두 무사로서 원래 같은 신분에 속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사이에 맺어진 주종제는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 체결된 계약관계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느 한편이 당초의 계약사항을 어기는 경우 원칙적으로 그러한 관계는 파기될 수 있는 것이었다. 봉신이 봉사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 주군이 그 봉토를 몰수할 수 있었음은 물론, 거꾸로 주군이 보호의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는 봉신이 주군에 대한 충성을 거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종제가 위는 국왕에서부터 시작하여 맨 아래 한낱 기사에 이르기까지 몇 겹으로 중첩되어 이른바 봉건제의 피라미드를 형성하고 있었다.

 유럽 봉건제도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원래 무사들의 사적인 도당으로 출발한 이 같은 주종제적 군사조직이 점차 국가의 공적인 통치기구로 발전해 갔다는 점이다. 나라와 사회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그러한 사적 군사조직이 나라 대신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심지어는 정의를 실현하는 일, 즉 국가가 하는 일을 맡아서 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사적인 군사조직이었던 주종관계는 비록 국왕을 정점을 하는 피라미드 형태로 전국적인 편제를 이루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강력한 왕권 아래 통제되지 않은 지방적 조직이었으며, 따라서 그것에 입각한 통치체제는 지방분권제였다.

국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권력은 강력하지 못했으며, 국왕 자신이 하나의 봉건영주였다. 모든 봉신, 그러니까 모든 기사에게는 주군으로부터 받은 봉토가 있었으며, 그는 자기 봉토 안에서는 자신이 하나의 영주로서의 배타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 그들은 자기 영지 안에서 징세, 치안유지, 재판 등 종래 국왕이 행사해 오던 권한과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항에서는 그들의 주군, 궁극적으로 국왕이라 하더라도 이에 개입할 수가 없었다. 소위 그들은 불입권, 즉 국왕권이 그 영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정치적인 측면에서 본 유럽 봉건제도의 특징은 그것이 기사 계층에 의한 지방분권적인 통치제도였다는 점에 있었다.

장원제

 한편 이러한 기사 계층이 전쟁과 통치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의식주는 물론 그들의 무장과 전비를 마련해 줄 사람들이 있어야만 했다. 이 일을 맡은 것이 바로 농민들이었다. 봉신들이 그들의 생계를 위해서 주군으로부터 받은 봉토는 대체로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장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장원에는 그 경작을 위한 농민들이 딸려 있었다. 농민들은 그 땅의 주인인 영주를 위해 땅을 경작해 주었으며, 그 대신 그 영주의 보호하에 생명을 유지하고, 또 그 영주의 땅의 일부를 빌려 이를 경작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말하자면 농민들은 영주의 땅을 빌어 살아가는 대신 그 지대를 일, 즉 노역으로 바쳐 영주의 땅을 경작해 준 것이다.

 농민들은 이러한 지대부담 이외에 여러 가지 무거운 부담을 별도로 지고 있었다. 그것은 오직 농민이 영주의 지배하에 있는 영민, 즉 예속민이기 때문에 지는 가령 중세 농민은 토지에 매여 있어 마음대로 떠날 수가 없다든가, 영민으로서 인두세를 바쳐야 한다든가, 아버지가 경작하던 토지를 아들이 계속 경작하기 위해서는 일정액의 상속세를 내야 한다든가, 딸을 결혼시킬 때는 혼인세를 내야 한다든가, 방앗간, 제빵소, 양조장 등 영주가 설치한 여러 시설을 억지로 사용해야 한다든가, 또는 영주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든가, 그 밖에도 온갖 자질구레한 부담을 지고 있었다. 이처럼 중세 농민들은 지대부담 이외에 영주의 예속민으로서 여러 가지 부담을 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농민이 곧 농노였으며, 이러한 농노에 의한 농장경영제도가 바로 농노제 혹은 장원제였다.

 장원은 그 크기나 구조가 일정하지 않았으나 그 전형적인 모습은 대게 다음과 같았다. 장원의 중심부에는 영주나 그 대리자가 사는 영주관이 있고, 교회와 농민들이 거주하는 집들이 한곳에 따로 모여 있었다. 토지는 경작지와 목장지, 임야, 황무지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경작지는 두 개 또는 세 개의 들로 나뉘어 해마다 번갈아 그중 하나씩을 휴경하는 2포제나 3포제에 의해 경작되었다. 들은 각각 여러 개의 소경구로 구성되었고, 각 소경구는 다시 여러 개의 지지로 구성되었는데, 영주직영지와 농민보유지는 장방형의 이 지조의 형태로 각 소경구에 혼재하고 있었다. 이들 지조는 좁은 도랑으로 구획되어 있었고, 소경구와 소경구 사이 또한 경작되지 않은 밭두둑으로 구분되어 있었을 뿐, 들 전체가 확 트여 있어서 이른바 개방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보유지를 공평하게 배분하려는 데서 마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경지제도 하에서는 농민들의 공동경작이 불가피 했으며,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의 작업은 물론 수확 후의 토지의 방목지로서의 이용, 그 밖의 공유지의 이용 등이 모두 농민들끼리의 합의, 그리고 농민들과 영주와의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한 합의는 대개 그 장원의 오랜 관습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중세 장원의 농노는 로마 말기의 콜로누스의 후손들이거나 몰락한 게르만의 자유민들이었다. 이들은 오랜 혼란기에 토지를 팔거나 빼앗기든지 또는 스스로 토지를 유력자에게 바치고 그 예속하에 들어간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노역지대 이외에 각종의 무거운 부담을 지고 있어 생활이 어렵고 힘겨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던 고대의 노예와는 달리 결혼해서 독립된 일가를 이를 수 있었고 자기 경작지의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장원의 오랜 관습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장원의 영주라 할지라도 함부로 깨뜨릴 수 없었으며 깨뜨리려 하지도 않았다. 이리하여 그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농민 중에는 생산을 늘려 경제적 여유를 가지게 된 자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농민 계층과 영주인 기사 계층 사이에는 엄격한 신분적인 차별이 있어 이들은 서로 뒤섞이지 않아 하나는 지배 계층으로, 다른 하나는 예속 계층으로 남아 있었다. 이와 같은 농노제 혹은 장원제에 입각한 기사 계층과 농민 계층 사이의 지배-예속관계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본 유럽 봉건제도의 특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