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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페르시아 전쟁과 그리스 문화

by kraneco 2024. 11. 1.

페르시아 전쟁

 그리스 세계에서 아테네의 귀족정이 참주정을 거쳐 민주정으로 발전하고 있을 무렵 오리엔트 세계에서는 급속도로 페르시아 제국이 형성되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 중엽에 페르시아는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을 병합하고 이집트를 정복하여, 서쪽으로는 에게해에서 동쪽으로는 인더스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 이오니아의 여러도시가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오리엔트 세계와 유럽 세계 사이에는 세기적인 첫 대결인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기원전 5세기 초 이오니아의 그리스인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가 원군을 보내 이들을 도운 것을 구실삼아 페르시아는 그리스 정복을 위한 대원정군을 기원전 492, 490, 480년 세 차례에 걸쳐서 파견했다. 그러나 이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기원전 490년 마라톤에 상륙한 페르시아의 대군은 아테네의 팔랑크스에 의해서 격퇴 되었고,  10년 뒤 해륙으로 침입한 페르시아의 대원정군 또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궐기한 그리스 동맹군에 의해서 격파당하고 말았다. 테미스토클레스가 거느린 아테네의 해군은 살라미스만에서 페르시아의 해군을 물리쳤고, 스파르타의 팔랑크스를 중심으로 뭉친 그리스의 육군은 플라타이애에서 페르시아의 육군을 물리쳤다.

 전쟁은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그리스인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주도권은 시종일관 페르시아 측에 있었고,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여러 도시들이 페르시아군에게 유린당했다. 다만 그리스인들은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여 마침내 페르시아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 전쟁의 승리를 전제적인 오리엔트 체제에 대한 자유로운 그리스 체제의 승리로 생각하고 이를 그들 체제의 우월성이라 생각했다. 그들의 사기, 특히 전쟁을 주도한 아테네인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전쟁 후 50년 동안이 그리스의 전성시대이며, 그리스의 전성시대가 곧 아테네의 전성시대였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문화

 전후에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하여 아테네의 주도하에 결성된 델로스 동맹은 사실상 아테네 제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에게해의 조그마한섬 델로스에 설치된 동맹의 금고는 어느새 아테네로 옮겨져, 그 돈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미화하고 공공건물을 건축하는 등 아테네를 위해서 쓰였다. 한편 전쟁 때 크게 공을 세운 아테네 해군의 수병들, 주로 조수로 복무한 노동자 계층에게도 참정권이 부여되고, 장군직을 제외한 모든 공직은 추첨으로 뽑히고, 공무집행자에 대한 수당이 지급되는 등 페르시아 전쟁 때에 그 유효성이 실증된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해 갔다. 이 시기 기원전 5세기 중엽이 그 유명한 페리클레스 시대였으며, 이 시기가 문화적으로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열주의 웅장한 신전, 조화와 균제의 극치를 이룬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이 건립된 것이 바로 이때였고, 그리스의 대표적 조각가 피디아스가 그 신전 안에 모신 아테네 여신상을 만든 것도 이때였는데, 이 여신상은 완전미를 추구하는 이상화된 인간의 육체미를 나타낸 그리스 조각의 걸작품이었다. 그 밖에도 그리스의 유명한 3대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이 이 시기에 수많은 작품을 써냈다.

 이 시기는 특히 철학의 분야에서 커다란 발전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스의 철학은 원래 만물의 근원인 아르케를 탐구하는 데서 비롯되었는데, 처음 탈레스가 그것을 물이라 대답한 이래, 혹은 공기라, 혹은 불이라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이 나왔다. 한편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본질을 오히려 끊임없는 변화로 보고 만물은 유전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자연철학은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는데, 그에 의하면 모든 물질의 근원은 그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극한적인 것, 즉 아토몬(원자)이며 만물은 무한한 많은 아토몬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관심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돌린 것은 이른바 소피스트들이었다. 그 대표자인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야말로 만물의 척도라 갈파했다. 소피스트들은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수사학과 변론술에 의해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하려 했다. 이런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그들의 지나친 자만을 나무라면서,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를 믿고 이를 추구하는 겸허한 철학자의 자세를 일깨운 것이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아테네의 길거리에 나아가 사람들과의 문답을 통해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려 했으며, 그러는 가운데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으로 진리에 대해 겸허할 것을 가르쳤다.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한다는 구실로 아테네가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동맹의 수입으로 황금시대를 누리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폴리스가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독주를 좌시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양대 세력을 중심으로 대립과 항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30년에 걸친 이 긴 내전은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지만, 스파르타의 패권 역시 오래 지탱하지 못한 채 그리스 세계는 끊임없는 내분과 전쟁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러더니 기원전 338년에는 마침내 북방에서 일어난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왕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그리스의 고전문화는 황금시대에 이어 더욱 완숙해졌다. 폴리스 시민의 윤리를 확립하려 했던 소크라테스가 시민들의 오해를 받고 처형되자 현실정치에 깊이 실망한 그의 제자 플라톤은 초월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상정하고, 그것에 입각한 이상국가의 상을 공화국안에 담았다. 다시 그의 뒤를 이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질인 형상이 독자적으로 이데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질량속에 내재한다고 보았다. 그의 이런 실재론은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함께 서양철학 두 조류의 근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의 모든 학문성과를 집대성하여 인문, 사회, 자연 등 전 분야에 걸친 학문적 체계를 세움으로써 그리스 철학을 완성했다.

 

그리스 문화의 특징

 연극에서는 황금시대의 3대 비극작가에 이어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구름, 개구리등을 통해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풍자하면서 사람들을 웃겼다. 역사학에서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를 쓴 투키디데스는 더욱 정확하고 비판적인 서술로 후세 사가에서 모범을 보여 주었다.

 이와 같은 그리스 고전문화의 특징은 인간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상주의적인 문화라는 데 있었다. 그리스 문화는 인간의 능력, 특히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문화였다. 그리스인들 역시 신을 존중하고 두려워했으나 고대 헤브라이인들이나 중세 그리스도교인들이 신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복종을 통해 구원을 바랐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인들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서 신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즉 완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이성의 힘에 의해서 가능하며, 그렇게 완전해진 인간의 모습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문화의 더욱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그리스인들의 폴리스 생활을 통해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종교, 학문, 문학, 예술 등 고대 그리스의 빛나는 문화는 그리스인들 개개인의 천부적 재질이 그들의 개인생활을 통해서 표현되었다기보다는 자유시민들의 자발적인 공동생활, 즉 폴리스 생활을 통해서 발현된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폴리스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고 폴리스의 번영과 영광을 추구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 문화는 이러한 그리스인들 노력의 소산이었다. 그리스 문화는 한마디로 폴리스의 문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