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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프랑크 왕국과 로마 카톨릭 교회

by kraneco 2024. 11. 4.

프랑크 왕국

 프랑크족은 여느 게르만족과 달랐다. 그들은 그들의 원주지인 라인강 하류지방을 버리지 않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서남쪽으로 확대해 갔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일찍부터 로마 카톨릭교의 정통파를 받아들임으로써 로마계 주민들과의 융합을 꾀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그 세력을 더욱 확대하여 마침내는 서로마 제국의 부흥까지도 성취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프랑크족의 팽창 역사는 사실 그리스도교 역사가들이 전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의로운 것은 아니었으며, 중세 음유시인들이 동경한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야만과 잔인, 음모와 배반으로 가득 찬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왕국의 역사가 유럽의 역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그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와 제휴하여 서로마 제국을 부흥시킴으로써 서유럽 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마련해 주고, 게르만 문화와 로마 문화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묶음으로써 새로운 유럽 문화를 이룩할 바탕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프랑크 왕국의 이 같은 역사적 사명은 클로비스의 뒤를 이은 메로빙 왕가의 용렬한 왕들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왕국의 사실상의 지배자였던 궁재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클로비스의 사후 그의 영토는 네 아들에 의해 분할 상속되었다가 다시 그중 하나에 의해 재통일 되었는데, 이러한 분열과 통일이 그 후에도 계속 되풀이되는 가운데 왕은 유명무실하게 되어 정치의 실권은 궁재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특히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이 에스파냐에서 쳐들어온 이슬람교도들을 투르와 프와티에 사이에서 격퇴하여 왕국과 그리스도교를 함께 구원하자,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에게 제휴의 손을 내밀게 되었으며, 이후 프랑크 왕국과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제휴는 급속도로 진전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제휴를 바라는 마음은 오히려 로마 카톨릭 교회 측이 더욱 절실했다. 그것은 이 무렵 로마 교회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대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령의 기원

 한편 새로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된 롬바르드족은 7세기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나 로마 교황과는 여전히 적대관계에 있어 로마는 그들의 침략 위협하에 있었다 이런 판국에 카롤루스 마르텔이 프랑크에 침입한 이슬람교도를 격퇴하여 그리스도교 세계를 지키자 교황은 프랑크 왕국에 손을 내밀어 이를 동로마제국에 대신할 새로운 보호자로 삼게 된 것이다.

 프랑크 왕국과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제휴는 카롤루스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 때에 이르러 급진전을 보였다. 739년 롬바르드가 로마를 공격했을 때 교황의 원조 요청에 대해 공손하기는 하나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카롤루스 마르텔과는 달리 피핀은 자기편에서 먼저 교황에게 접근했다.

 751년 그는 로마 교황에게 서신을 보내 실권을 쥔 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과 무능한 왕위 계승자가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 중 어느 것이 바람직한가를 물었다. 교황은 곧 전자의 정당성을 회답했고 피핀은 이것을 근거로 왕위에 올라 게르만의 사도라 불린 대주교 보니파키우스의 축성을 받았다. 이로써 카롤링 왕조가 시작 된 것이다. 다음해에 롬바르드의 왕 아이툴프가 로마를 위협하자 교황 스테파누스 2세는 몸소 프랑크 왕국에 나아가 피핀의 원조를 요청하면서 그와 그의 두 아들을 축성했다. 이에 피핀은 이탈리아에 진군하여 아이스툴프를 굴복시키고 이탈리아 중부의 땅을 빼앗아 이를 교황에게 기증했는데, 이것이 로마 교황령의 기원이다.

카롤루스 대제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가 800년에 로마 교황 레오에 의해 서로마 제국의 황제관을 받게 된 것은 양측의 제휴가 절정에 달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카롤루스는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에 침공해 롬바르드 왕국을 멸했으며 동쪽으로는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를 정복하고 색슨족을 공략하여 엘베강 이서지방을 프랑크 왕국의 판도 안에 넣는 한편, 서쪽으로는 에스파냐 땅에 진격하여 피레네 산맥 너머에 에스파냐 변경령을 설치하는 등 8세기 말까지 중부유럽 일대에 거대한 왕국을 이룩했다. 이리하여 교황 3세는 800년 겨울 카롤루스에게 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그것은 당시 반대자들의 반항으로 궁지에 몰렸던 교황이 카롤루스의 환심을 사서 그의 지지를 얻으려는 속셈에서 나온 행동으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 국가의 제왕으로서 국가와 교황 대한 그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는 카롤루스의 속셈도 없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의 의도야 어떻든 카롤루스의 대관은 유럽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과 문명의 쇠퇴에 종지부를 찍고, 유럽 세계의 새로운 사회질서와 새로운 문명형성의 제1단계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로마 교회는 동로마 황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어 그리스도 교권은 동쪽의 그리스 정교권과 서쪽의 로마 카톨릭교권으로 갈라서서 이후 오랫동안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카롤루스는 전국을 여러 주로 나누어 그 장으로서 백을 두고 변경이나 전략적 요지에는 군대의 지휘관을 변경해 또는 공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으며, 그 외에 따로 감찰관을 파견하여 이들을 감독하게 하는 등 왕의 지배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그러한 관리들은 어디까지나 왕의 사적 종자일 뿐 중앙집권적 관료들은 아니었다. 그는 교회를 보호하면서도 이에 대한 지배권 확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성직자의 임명·감독은 물론 그리스도교의 교리문제에까지 간여했다.

한편 그는 게르만족들의 여러 법률을 편찬·정비하고, 궁정학교나 교회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쓰고, 앨퀸 등 이름난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문을 일으키며 흩어진 라틴어 문헌들을 수집하는 등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희미해져 가고 있던 문화의 빛을 다시 빛나게 하여, 이른바 카롤링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그는 그야말로 대제란 칭호로 불려 마땅한 국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