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왕국의 분열
칼로루스 대제가 죽고 난 후 얼마 안 가서 그의 제국은 다시 분열되고 말았다. 그것은 프랑크족 고유의 분할상속제에 의해 카롤루스의 손자들에 의해 제국의 영토가 분할상속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카롤루스 대제가 남긴 통치조직이 내우외환에 빠져 있던 제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제국의 전 영토를 통치할 만한 강력한 집권체제를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카롤루스 대제가 죽자 그의 아들 루이 1세 재위가 뒤를 이었으나,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자신의 세아들에게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 주면서도 어떻게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제국령을 셋으로 나누어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을 세 아들에게 할당하면서도 두 아우 샤를과 루이가 제위를 이을 장형 로타르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곧 분쟁이 일어나 부자간과 형제간에 골육상쟁이 거듭되다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국토는 3분되어, 로타르는 이탈리아와 중부 프랑크를 차지해 제위를 이어받고, 샤를은 서프랑크를, 루트비히는 동프랑크를 차지해 각각 왕이라 칭했다. 그 후 다시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중부 프랑크는 동·서 프랑크에 분할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국이 분열되어 서로 싸우는 동안에 이득을 본 것은 지방의 유력자들이었다. 공이나 백 등 지방의 관리들은 제각기 자기 관할지역에 눌러앉아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왕권은 약화되고 황제의 지위도 유명무실하게 되어 갔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는 카롤링 왕조의 혈통이 가장 먼저 단절되어 제후가 도시 각지에서 세력을 편 데다가 동프랑크의 왕조에서도 카롤링 왕가의 왕통이 끊어지고, 그 뒤에는 제후들의 선거에 의해 프랑켄 공 콘라트, 그리고 그를 이어 작센 공 하인리히가 왕위에 올랐다. 하인리히의 아들 오토 1세는 제후들의 반란을 진압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헝가리에 침입한 마자르인들을 격퇴하고 이어 이탈리아에 진군하여 교황으로부터 제관을 받았다. 이것이 신성로마 제국의 시초인데, 이후 독일의 왕이 황제의 칭호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독일에서도 제후의 세력은 점점 강대해지는 반면 황제의 지위는 날로 약화되어 나라는 분열의 극에 달했다. 서프랑크에서도 상황은 비슷하여 왕권은 약화되고 제후들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특히 9세기 이래 거듭된 노르만의 침범을 막아내지 못한 국왕들의 권위는 더욱 떨어지게 마련이어서, 987년에는 마침내 카롤링 왕조의 왕통이 끊어지고 미약한 파리 위그 카페가 제후들에 의해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14세기 초까지 프랑스 국왕은 이 카페 왕가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동안 프랑스 정치의 실권은 제후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이민족들의 침범
프랑크 왕국을 이은 유럽 3국이 이렇듯 내부적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에 유럽은 새로운 이민족의 침입으로 시달림을 받았다. 9세기 말엽부터 10세기 말엽까지 유럽 세계는 남으로부터는 이슬람교도들 즉 무실림들, 동으로부터는 마자르인들, 그리고 북으로부터는 노르만인들에 의해 침범당하고 약탈당했다.
그 중 맨 처음 침입한 것이 무슬림들이었다. 그들은 8세기 초엽 프랑스에 침입했다가 카롤루스 마르텔에 의해 격퇴당한 후에도 계속 프랑스 남쪽과 이탈리아 해안지대를 침범해 10세기 말까지 지중해는 사실상 그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침범은 이처럼 오랫동안 계속되기는 했지만 그 피해는 그다지 큰 편이 아니었다.
이와는 달리 가장 뒤늦게 나타나 비교적 단기간에 그쳤지만 유럽인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준 것은 마자르인들의 침입이었다. 아시아계의 기마족이었던 마자르인들은 9세기 말 헝가리 지방에 침입해 온 후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 심지어 프랑스 남부 지방까지도 침범했는데, 955년 레히펠트에서 오토 1세에게 격퇴당한 후로는 헝가리에 머물러 살았다.
한편 오랫동안 계속되어 유럽에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노르만의 침입이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연안에 거주하여 노스맨 또는 바이킹이라고도 불린 노르만인들은 조선과 항해의 능력이 뛰어나 9세기 말엽부터 11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거의 모든 해안지방, 심지어 지중해 연안까지도 침범했다. 그들은 말하자면 서양의 왜구라고나 할 자들로서 야밤에 허술한 곳을 골라 치고 새벽같이 달아나는 이른바 ‘치고 달리기’ 전법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후에는 아예 해안의 일각을 점거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주변 일대를 닥치는 대로 노략질했으며 점차 강을 따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도 침범했다.
노르만의 세력 확장
특히 피해가 심했던 지역이 잉글랜드의 동북부와 프랑스의 서북부 해안 지방이었다. 이때 잉글랜드를 침범한 노르만인들은 데인인이라 불렸는데, 그들은 9세기 이래 잉글랜드의 동쪽 해안지대를 자주 침공해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9세기 말에 웨식스의 앨프리드 대왕이 한때 이들의 침공을 막았으나 완전히 격퇴하지는 못하고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을 그들에게 내어 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부터 이 지방을 데인로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로도 데인인의 침범은 계속되어 오다가 10세기 말부터는 다시 대대적인 침공이 거의 해마다 되풀이되어 잉글랜드의 왕은 막대한 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을 매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1세기에 들어와서는 한때 데인의 왕 크누트가 잉글랜드와 스웨덴의 왕을 겸하여, 유럽 북쪽에 데인인에 의한 해상제국이 성립되기까지 했다. 그 후 앵글로-색슨의 왕가가 한때 회복되었으나 1066년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침입하여 왕위에 오르고 노르만 왕조를 시작했다. 이것이 유명한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으로서 이를 계기로 이제까지 비교적 고립된 잉글랜드가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들과 더불어 유럽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잉글랜드를 정복한 윌리엄의 본거지 노르망디 공국 자체가 노르만의 서프랑크 침범의 소산이었다. 9세기 중엽 이래 노르만들은 낭트, 보르도, 루앙 등 프랑스 서북부해안은 물론 툴루즈, 오를레앙 등 내륙지방까지도 끊임없이 침범했다. 9세기 말경부터 그들의 침공이 더욱 심해지더니, 10세기 초에는 롤로가 이끄는 노르만들이 센강 하류지방에 영구적인 거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고, 이들을 막아내지 못한 서프랑크의 왕 샤를 3세는 그를 노르망디 공에 봉하고 로베르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주었다. 이리하여 이 지역이 노르망디라 불리게 되었으며, 그 뒤 이곳 노르만들은 프랑스어와 프랑스의 관습과 제도를 받아들여 급속도로 프랑스 문화에 동화되었다. 따라서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만인들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난폭한 노르만이 아니라 이미 프랑스화한 개명된 노르만들이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노르만의 일부는 지중해에까지 진출하여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침범하는가 하면, 북부 유럽에서는 루릭이 이끄는 노르만들이 러시아에 침입하여 노브로로드 왕국을 세우고, 이어 키예프 공국을 건설하여 러시아의 기원이 되었다. 이 밖에도 노르만의 일부는 아이슬란드에 진출했고, 심지어는 그린란드를 거쳐 북아메리카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