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회세력의 신장
중세 사회는 봉건적인 기사 계층에 의해서만 지배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특권신분인 교회 성직자 계층에 의해서도 지배되고 있었다. 기사들이 정치적, 현세적 지배층이었다면 성직자, 즉 신부들은 종교적, 정신적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다. 서양 중세 사회는 말하자면 이들 봉건기사와 교회 신부들의 이중 지배하에 있었으며, 이 두 지배 계층은 상호 제휴하여 함께 성장하고 함께 지배하다가 함께 쇠퇴해 갔다.
기사들의 지배체제인 봉건제가 중세 초기의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성장했듯이 신부들의 사제조직인 교회도 같은 시기의 혼돈과 불안상태 속에서 자라났다. 즉,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에 봉건제가 자리를 굳혀 가고 있을 무렵에 프랑크 왕국과 제휴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서유럽 일대를 그리스도교화 하여 그 정신적 권위를 확립해 갔다. 7세기 말엽 잉글랜드의 교회가 위트비의 종교회의를 통해 로마 교회의 권위를 받아들이게 된 이후 잉글랜드의 교회는 게르만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8세기 중엽 잉글랜드 출신의 수도사 보니파키우스는 라인강 너머 게르만의 땅 각지에 수도원을 세워 이 지역 게르만족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이어 9세기에는 프랑크의 루이 1세 역시 수도사 스칸디나비아에 파견하여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3국을 그리스도교화 했으며, 다시 10세기에는 오토 대제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폴란드, 뵈멘, 헝가리 등 동부유럽에 대한 전도사업도 활발히 수행되어 이들 주민들이 로마 카톨릭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로마 교회의 권위는 이러한 이교도들의 개종을 통해 정신적, 종교적 면에서만 높아진 것이 아니었다. 각지의 유력한 교회는 국왕이나 제후 또는 그 밖의 신앙심 두터운 사람들로부터 많은 토지를 기증받아 대토지 소유자가 되었으며, 이러한 교회는 정치적, 세속적으로도 제후와 마찬가지로 토지와 주민들을 지배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피핀으로부터 중부이탈리아의 넓은 땅을 기증받은 로마 교회의 세력은 막강하여 그 주교는 교황으로서 서유럽의 모든 교회와 수도원을 통괄하는 최고 우두머리의 지위를 차지하고, 그 아래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 성직자의 계서제가 성립했다.
교회의 타락
그러나 이렇게 교회의 세력이 외면적으로 확대되고 그 세속권력이 증대함과 동시에 서유럽 중심지의 교회들은 타락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10세기에 그러한 타락상은 극에 달해 여러 가지 폐단들이 나타났는데, 그중 가장 심한 것이 성직자의 대처와 성직매매였다.
중세 교회의 성직자는 크게 두 종류로 대별되어 그중 세속성직자는 교회에서의 7성사를 통해 신도들의 구원의 임무를 맡았으며, 수도성직자는 수도원의 규칙에 따른 생활을 통해 신에 헌신했는데, 이들 성직자들은 모두 독신을 지켜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중에는 실제적으로 결혼한 자가 많아 이들은 종무보다는 오히려 처자식을 위한 치재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특히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에는 십일조 이외에도 헌납금, 수수료, 소유영지로부터 나오는 수입 등 많은 재산이 딸려 있어 성직자들의 세속사에 대한 관심은 그만큼 더 컸다. 이처럼 성직이 수입의 원천으로 생각됨에 따라 성직은 차츰 매매의 대상으로 되어 갔으며 나중에는 매매가 오히려 성직임명의 통상적 방법이 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세속화하고 타락하게 되자 성직자 중에는 교회의 정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10세기 초에 이러한 사람들의 일단이 수도원의 개혁운동을 시작했다. 910년 그들은 프랑스의 리용 북쪽에 클뤼니 수도원을 세워 이를 중심으로 개혁운동을 추진했다. 그들의 교회의 타락의 근원이 교회의 세속화에 있으며, 교회 세속화의 근본 원인은 성직서임권이 국왕이나 제후 등 세속지배자에게 장악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클뤼니 수도원은 봉토로서의 토지를 갖지 않았고, 수도사 스스로 수도원장을 선출했으며, 국왕이나 제후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수도원을 로마 교황에게 직속시켰다.
11세기 말엽에 클뤼니 출신의 수도사 힐데브란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로 등위하자 교회의 개혁운동은 한층 더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는 단호하게 성직자의 결혼과 성직매매를 금지하고, 성직의 서임권을 세속지배자들의 손에서 빼앗아 교황의 수중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독일 안의 많은 교회에 대해서 실제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처사였다. 이래서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성속의 두 지배자가 성직의 서임권을 둘러싸고 싸운 이른바 서임권투쟁의 시작이었다.
서임권 투쟁
싸움은 교황의 황제에 대한 파문선고와 황제의 교황에 대한 폐위선언으로 시작되었으나, 결국은 독일 제후의 지지를 얻지 못한 황제가 이탈리아의 카노사에서 교황에게 사죄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것은 이 무렵 교황의 권위가 그만큼 강대해진 것을 표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계기로 교회의 권위가 세속지배자의 권위를 압도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카노사의 굴욕 후 황제 하인리히는 독일 내의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곧 로마에 쳐들어와 교황 그레고리우스를 내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속의 싸움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으나 어느 편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한 채 1122년에 마침내 황제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 2세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곧 보름스 협약으로서, 이 협약에 의해 국왕은 주교를 임명하는 권리를 포기하지만 주교는 국왕이 봉신이 되어야만 했다. 황제가 성직자의 서임권을 포기한 것은 프랑크 왕국 이래의 속권 우월의 전통이 사라진 것을 의미했으며, 그 후 한때는 교권이 속권보다 우위에 올라선 것처럼 보인적도 있었다. 특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시대에 교황권은 전성기에 달해 황제 프리드리히 2세나 영국의 존 왕이 그에 맞섰다가 모두 굴복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권 우월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고, 11세기 이후 중세 사회는 대체로 성속의 양권이 병립하여 상호제휴도 하고 상호견제도 하면서 함께 지배한 사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