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제국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서유럽에서는 봉건제도가 성장하여 지방분권적인 체제가 퍼져 가고, 로마 교회의 세력이 신장하여 세속권과 맞서게 되었으나,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비잔틴 제국에서는 황제의 권력이 그대로 유지되어 로마 제국 말기와 같은 황제교황주의적인 전제정치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요새로서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서도 침범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 흑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이른바 ‘비단길’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상공업의 중심지로서 중세 최대의 도시였다. 이리하여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거듭되는 이민족들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를 근거지로 삼은 비잔틴 제국은 그 후 천년 가까이 존립할 수 있었다.
비잔틴 제국의 세력이 크게 팽창하여 옛 로마 제국의 위세를 되찾은 것은, 라틴어를 일상용어로 사용한 마지막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재위시대인 6세기 중엽의 약 반세기 동안이었다. 그는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과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을 멸하고, 에스파냐 남쪽 해안과 시칠리아섬들을 되찾아 갈리아와 브리튼을 제외한 로마 제국령을 대부분 수복했다. 한편 신구 로마법을 집대성하고, 성 소피아 성당을 건립하고, 양잠법을 들여와 견직공업을 일으키는 등 내치에도 힘써 그의 치세 동안은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이 되살아난 듯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제국은 롬바르드족과 프랑크족에 의해 다시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동쪽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그 뒤를 이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시리아와 이집트 등 오리엔트의 영토를 빼앗기더니, 마침내는 아랍인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이 공략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718년 황제 레오 3세는 수도에 육박한 이슬람교도를 격퇴하고 이어 이들을 다시 소아시아에서 몰아냈다. 이것은 카롤루스 마르텔이 프랑스에 침입한 이슬람교도를 격퇴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를 이슬람교도들의 침공에서 막아낸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이슬람교도들은 크레타섬과 시칠리아섬을 점령하고, 이를 거점으로 하여 그리스와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침범을 계속했다. 한편 발칸 반도 북쪽에서도 아바르인과 불가르인의 침략에 이어 슬라브족의 제국령내 식민운동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8세기 말엽 이후 제국은 겨우 발칸 반도의 남단과 소아시아만을 가진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고수되었으며, 영토는 줄어들었지만 제국의 통일성이나 동질성은 오히려 더욱 공고해졌다. 비잔틴 제국은 이제 잡다한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복합국가가 아니라 발칸 반도 남부와 소아시아의 그리스계 주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더욱 집약적이며 균질적인 통일국가가 되었다. 그것은 로마적 제국에서 그리스적, 헬레니즘적 제국으로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비잔틴 제국의 정치제도, 경제조직, 종교,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나타났는데, 그 단적인 표현은 이 무렵부터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가 제국의 공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군사제도를 비롯한 통치조직은 7세기 때부터 한층 더 효율적으로 정비되어 갔다. 즉, 동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여 군관구제와 둔전병 제도가 실시되었다. 그것은 군관구의 사령관에게 군정과 민정의 양권을 겸하게 하고 병사에 대한 보수로 소토지를 급여하여 병·농의 임무를 겸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군정과 민정에 대한 황제의 통솔권을 강화하고 소토지 소유의 자유농민층을 육성하려 했던 것이다. 726년 황제 레오 3세가 발포한 우상금지령을 계기로 치열하게 전개된 우상숭배논쟁 또한 그 신학적 논의의 이면에는 우상숭배를 주장하는 교회, 특히 수도원을 억제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황제의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현실적인 동기가 담겨 있었다. 황제가 교회의 우두머리를 겸한다는 이러한 비잔틴 제국의 황제교황주의는 로마 교황과의 대립을 격화시켜 11세기 중엽에는 마침내 동서교회가 완전히 분리되기에 이르렀으며, 이후 비잔틴 제국에서는 황제교황주의를 받아들인 그리스 정교의 전통이 비잔틴 문화의 중요한 특질을 이루게 되었다.
번영과 멸망
그 후 이슬람 세계가 분열하여 그 팽창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비잔틴 제국은 9세기 말엽에 시리아의 북부와 크레타섬을 회복하여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았다.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가 정비되고 군관구제가 회복하여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았다.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가 정비되고 군관구제가 확대 실시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길드 제도가 완성된 것도 이 무렵이었으며, 이것으로 수도의 모든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다.
이리하여 9세기 말엽에서 10세기 말엽까지는 제국의 세력이 다시 한번 융성해져 동쪽과 북쪽에서 밀어닥치는 외침을 막아내고 제국을 지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유력한 군인이나 관리가 대토지를 사유화함으로써 군관구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11세기부터는 이들 대토지 소유자들이 봉건영주화하여 황제권에 대한 반항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동쪽에서 셀주크 투르크족이 일어나자 비잔틴 제국은 다시 소아시아의 땅을 이들에게 빼앗겼다. 13세기 초에는 같은 그리스도교인 십자군 병사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한때 라틴 제국을 세우는 등 제국의 힘은 점점 약화되기만 하더니, 마침내 1453년에는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당하기에 이르렀다.
로마 카톨릭 문화권에 속한 서유럽 사람들은 종래 이러한 비잔틴 제국의 역사적 의의와 비잔틴 문화의 가치를 별로 높이 인정하지 않아 왔다. 가령 프랑스인들은 비잔틴 제국을 일명 저제국이라 불러 왔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들과 오랫동안 대립관계에 있었던 그리스 정교 문화권에 대한 로마 카톨릭 문화권 사람들의 편견에서 나온 것이다. 비잔틴 제국의 역사적 의의는 흔히 지적되듯이,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세계를 오랫동안 지켜 왔으며, 그것을 통해서 고대 문화의 유산이 보존되고 계승되었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잔틴 문화
비잔틴 제국은 중세를 통해 하나의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문화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것은 고전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였으며, 거기에 그리스 정교가 결합되어 라틴적, 게르만적이며 로마 카톨릭적인 서유럽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잔틴 문화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비잔틴 미술인데, 특히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세밀화는 비잔틴의 대표적 미술양식이었다. 그것은 그리스의 고전미술의 전통 위에 오리엔트 각지의 미술이 흡수되어 그리스 정교 미술로 통일된 것으로서, 그 속에는 그리스의 현세적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오리엔트의 신비적 위엄과 융합되어 있었다. 비잔틴 미술의 대표적 건축인 성 소피아 성당은 페르시아의 돔과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이 결합되어 외형도 웅장하지만 그 내부를 장식한 모자이크 벽화의 화려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것은 필사본의 첫머리 글자를 장식화한 세밀화와 마찬가지로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채로 비사실적인 문양이나 상징들을 다양하게 그려 넣은 것인데, 그 속에 또한 장엄하고 환상적인 미의 세계가 창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여러 세기 동안 하나의 빛나는 문화권으로 존속하여, 서유럽 문화와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서유럽 세계가 극심한 혼란상태에 빠져 있던 중세 초기에 비잔틴 세계는 서유럽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문화를 유지해 왔으며,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서유럽 문화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유럽에 새로운 문화가 성립된 뒤에도 이들 동서의 그리스도교 문화는 서로 대립한 가운데 지속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쳐 왔던 것이다.
비잔틴 문화에 의해 특히 강력한 영향을 받은 것은 슬라브족의 여러나라 들이었다. 유럽 동북부의 넓은 초원과 삼림지대에 살고 있던 슬라브족들이 도나우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의 영내에 침투해 들어온 것은 6세기경부터의 일이다. 그 후 그들은 계속 제국 영내에 이주해 오더니 점차 여기에 정착하게 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비잔틴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한편 9세기에 북쪽에서 내려온 노르만족에 의해서 세워진 키예프 공국은 블라디미르 1세 때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는 비잔틴의 공주와 결혼하고,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여 국민에게도 이를 강제하는 한편, 문자나 미술양식 등 비잔틴 문화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비잔틴 문화권이 동북부 유럽 지역으로 확대되고, 장차 러시아가 동로마 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아 서유럽과 맞서기 위한 기틀이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