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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슬람 제국의 성쇠와 왕조

by kraneco 2024. 11. 10.

이슬람 제국의 성쇠

  무함마드가 죽은 뒤 그의 후계자로 선출된 칼리프들은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정교 양면에서 무슬림의 지도자가 되었다. 칼리프의 지도 아래 이슬람교의 신앙으로 뭉친 아랍인들은 전 세계를 알라신의 지배하에 넣기 위해, 그리고 한편으로는 늘어나는 무슬림들을 위한 생활권을 획득하기 위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정복했으며, 이어 분열상태에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켜 중앙아시아까지 나아가고, 또 이집트를 정복하여 북아프리카로 진출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이견이 나타났다. 원래 코란의 순수성을 유지할 것과 무함마드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가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시아파와 코란에 구전의 전승을 부가하는 것과 무함마드 혈통이 아닌 자의 칼리프 선출을 인정하는 수니파로 나뉘게 된 것이다. 7세기 말엽에는 메카의 상인출신으로 시리아 총독인 우마이야가의 무아위야가 무함마드의 사위로서 제4대 칼리프였던 알리를 몰아내고 스스로 칼리프가 되었다. 그는 수도를 메디나에서 다마스커스로 옮겨 우마이야 왕조를 열었는데, 이후 약 107년 동안 칼리프의 지위는 이 우마이야가에게 세습되었다.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영토는 더욱 넓어져 동쪽으로는 파미르 고원 가까이에서 당나라와 접경하게 되고, 8세기 초에는 인도에까지 그 세력이 미쳤으며,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를 거쳐 지브로올터 해협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여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에 침입한 그들이 카롤루스 마르텔에 의해 격퇴당한 것이나,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다가 레오 3세에 의해 격퇴당한 것이 모두 이 우마이야 왕조 시대 후기의 일이었다.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이렇게 단시일 내에 급팽창한 이슬람교도들을 보고 두려워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들은 흔히 이슬람교도들이 한 손에 코란, 다른 손에 칼을 들고 코란을 받아라, 그렇지 않으면 칼을 받으라고 하면서 다른 민족들을 정복했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실상 이슬람교도들은 정복한 이교도들에 대해서 오히려 관용적인 편이었다. 그들이 정복전을 [지하드]라 믿고 용감히 싸운 것은 사실이지만, 정복민에 대해서는 흔히 이슬람교로 개종하든가 납세 의무를 지든가, 양자택일하게 했으며, 억지로 개종을 강요하거나 잔인한 살육을 자행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세력팽창이 그처럼 급속했던 것은 그들의 무력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종교가 그리스도교보다 더욱 철저한 일신교였던 데다가, 그들이 진출한 지역에는 로마 교회의 삼위일체설에 반대한 아리우스파의 세력이 커서 좀더 용이하게 이슬람의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바스 왕조

 초기의 이슬람 사회에서는 모든 무슬림들이 평등하여 그들 사이에 신분의 차가 없었다. 오랜 유목생활에 젖어 온 그들의 토지를 영유하지 않고 요지에 막사를 치고 공동생활을 영위했다. 군사적 정복자로서 지배한 그들은 정복민에게서 지조와 인두세를 징수하여 그것으로 생활했는데, 이러한 수입은 전쟁 때 획득한 전리품과 함께 모든 무슬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정복전이 계속되어 영토가 농경지대에까지 확대됨에 따라서 점차 정착생활이 시작되고 토지소유가 허용되어 그들 사이에 새로운 유력자들이 지배계층으로 성장해 갔다.

 우마이야의 다마스커스에서는 아랍계 무슬림들이 유력하여 비아랍계 무슬림들은 세력을 펼 수 없어 이들 사이에 점차 불만이 늘어 갔다. 8세기 중엽 페르시아 근처에서 성장하고 있던 시아파의 일부가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우마이야의 칼리프를 타도하고 새로 아바스 왕조를 열었다. 이 반란의 주모자가 아불 아바스였는데, 그 자신은 시아파가 아니라 무함마드의 사촌의 증손이었다. 아바스는 그 뒤 수도를 티그리스강변의 바그다드로 옮기고, 아랍계 무슬림과 비아랍계 무슬림을 평등하게 대우하여 이들의 융합을 꾀했다. 이리하여 아바스 하에서는 아랍적, 시리아적, 페르시아적 요소들이 융합된 더욱 폭넓은 이슬람 문화가 발전하여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바스는 이슬람 세계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파티마 왕조

 우마이야의 일족이 에스파냐로 난을 피해 들어가 코르도바를 수도로 하여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웠으며, 그 후 10세기 초엽에는 이 에스파냐의 통치자가 바그다드의 칼리프에 맞서 칼리프를 자칭하기에 이르러 이슬람 세계는 이때부터 동서 두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다. 한편 10세기 후엽 이집트에서는 시아파에 의한 새로운 이슬람 국가가 독립하여 파티마 왕조를 열었다. 파티마 왕조는 카이로를 수도로 정해 북부아프리카 일대를 지배했다. 카이로는 그 부와 힘에서 점차 바그다드를 능가하게 되었고, 바그다드의 정통파였던 수니파는 카이로를 지배한 분파인 시아파에게 한때 완전히 압도당하는 듯이 보였다.

아바스 왕조의 세력이 이처럼 약화되자 이 왕조가 지배하는 국내 각지의 에미르들이 점차 군사적,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제각기 독립했는데, 그들은 북쪽에서 투르크인 용병들을 불러들여 군사력을 길렀다. 그러나 이들 투르크 용병들 자신이 곧 실권을 잡게 되고 제각기 술탄이라 칭하게 됨에 따라, 이들 투르크인에 의한 술탄 정치가 칼리프 정치를 대신하게 되었다.   한편, 이 무렵에 투르크인들 중 일부는 파미르의 북쪽 키르키즈 지방과 남쪽 아프가니스탄에 각각 카라한 왕조와 가즈니 왕조를 세워 서로 다투고 있었으며, 11세기에는 투그릴 베그가 이끄는 셀주크족이 일어나 삽시간에 아무강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광대한 나라를 세웠다. 그들은 1055년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아바스조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의 칭호를 받았다. 이것이 유명한 셀주크 투르크로서, 그 후 그 영토가 더욱 확대되어 시리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소아시아까지 합쳐 동쪽은 천산산맥에서 서쪽은 지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했다. 이리하여 동부 이슬람권의 정치적 지배권은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에 이어 이들 투르크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역시 그들도 이슬람교로 개종함으로써 이슬람 문화에 동화되었다. 이 셀주크 투르크가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게 된 것을 계기로 11세기 말에 십자군 원정이 일어나게 되고, 이후 이슬람 세계와 그리스도교 세계는 근 200년 동안 서로 맞서 싸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