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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슬람 문화의 특징

by kraneco 2024. 11. 11.

이슬람 문화

 이슬람 문화의 황금시기는 우마이야 왕조 후기와 아바스 왕조 초기였다. 특히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걸친 하룬 알 라시드의 칼리프시대가 전성기였다. 이때의 수도 바그다드는 동서 문화의 교류지의 중심지로서 그 번영은 당의 수도 장안이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못지 않아, 이곳을 중심으로 이슬람 문화가 사방으로 전파되었다. 이슬람 문화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였던 것이다.

 이슬람 문화의 기본적 특징은 문자 그대로 그것이 이슬람교라는 종교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 있었다. 그것은 본시 유목생활이나 대상활동에 종사하던 아라비아인들이 그들보다 문화적으로 앞서 있던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 등지의 주민들을 정복하여 이들을 이슬람화함으로써 이루어진 종교 중심적인 문화였다. 아라비아인들은 정복은 하였으되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여 하나의 종합적인 문화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종합은 이슬람교라는 도가니 속에서 이루어졌다. 시리아인이건 이집트인이건, 또는 페르시아인이건 모든 무슬림들은 알라의 뜻에 따르는 것, 즉 이슬람을 그들의 생활에서의 제일 지침으로 삼았다. 비단 종교생활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생활에서 그러했다.

 이리하여 무슬림들은 신학과 법학, 문법학과 수사학 등 소위 아라비아 고유의 학문을 매우 중시했다. 왜냐하면 이슬람교의 핵심은 신이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것을 집대성한 코란에 있었으며, 신학을 비롯한 고유의 학문은 바로 이 코란의 해석에서 파생된 학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코란은 이슬람교도들 생활의 기본지침을 제시해 준 성전이었지만, 그것이 그들 일상생활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빠짐없이 직접적인 지시를 내리고 있지는 않았다. 이래서 그들은 이러한 문제에 관한 대답을 얻기 위해 무함마드 제자들의 행적에 관한 전승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것으로도 해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자, 이슬람 교리의 전문가들인 울레마에 의해서 성법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코란전승성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곧 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상으로는 이것들에 관한 전문적 지식을 가진 울레마의 판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다.

외래 문화의 보존 발전

 당초의 칼리프는 종교와 정치의 양권을 아울러 장악한 오리엔트적인 강력한 전제군주였지만, 그의 종교적 지배권은 이래서 점점 울레마의 수중을 넘어가게 되고 그는 세속지배자로만 남게 되었다. 이 경향은 특히 아바스 왕조 성립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이러한 현실주의적인 타협에 반대하여 코란의 순수성을 고수하려는 이상주의자들이 곧 시아파였다.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이러한 대립이 오늘날의 이슬람 세계에서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또 그것이 이슬람 사회에서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슬람교가 그들의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또 지금도 차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의 종교 중시와 소유의 학문중시가 그들의 세속문화나 외래의 학문의 발달을 저지하거나 질식시키지는 않았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들은 흔히 이야기되어 오듯이 그렇게 호전적이거나 비관용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하는 그들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한편, 외래의 문화를 받아들여 이를 보존하고 발전시켰으며, 나아가서 이를 사방으로 전파시켰다. 삼위일체설을 부인한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교보다 훨씬 합리적인 종교였으며, 그 교리는 단순하고 명료했다. 그것은 그리스의 철학이나 오리엔트의 과학과 양립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이슬람은 비잔티움과 더불어 고대의 학문을 계승하고 보존하여 이를 서유럽에 전달했다.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의 고전들이 아랍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우마이야 왕조 말기와 하룬 알 라시드 칼리프 시대였지만, 이슬람의 학문활동, 특히 이들 외래의 학문에 대한 연구활동의 절정기는 알 마문 칼리프 시대였다. 그 시대에 바그다드에는 대학과 천문관측소가 세워지고, 그리스와 오리엔트의 중요한 철학서와 과학서가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리하여 900년까지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학자들의 거의 모든 저작들을 이슬람 학자들은 아랍어로 읽을 수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네오플라톤주의에 입각한 철학체계를 세운 아비세나와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을 단 에스파냐의 무슬림 학자 아베로에스는 이들 이슬람 철학을 대표하는 학자들이었으며, 아랍어로 쓰인 이들의 저작들이 후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유럽인들에게 읽히게 되었다. 아랍어는 당시 전체 이슬람 세계의 공통어가 되어 있었다. 이슬람교에는 코란의 번역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모든 무슬림들은 코란을 읽기 위해서 아랍어를 습득해야만 했으며, 이래서 아랍어는 그리스어에 대신하여 오리엔트와 북아프리카 일대의 국제어가 되어 있었다.

이슬람의 과학과 문학

 과학 분야에서 이슬람교도들의 업적은 한층 더 눈에 띄었다. 무슬림 학자들은 그리스의 에우클레이데스 기하학을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인도에서 영의 개념을 받아들여 이른바 아라비아숫자에 의한 수 체계를 만들어 냈다. 그들은 또 삼각법, 해석기하, 그리고 그 어원이 아랍어인 대수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나타냈다. 그 밖에도 그들은 의학과 화학 분야에서 몇몇 업적을 나타냈다. 그들은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를 넘어서 눈병, 천연두, 홍역 등에 관한 교과서를 저술했고, 10세기에 페르시아의 알 라지는 20권으로 된 이학대전을 저술했다. 화학은 연금술에서 발달했다. 비금속을 귀금속으로 만들어 내려는 이 연금술은 마술과 과학이 뒤섞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올바른 과학의 발달을 오히려 방해한 면도 없지 않았으나 이를 통해서 승화, 여과, 용해, 증류 등 화학실험 방법이 발달한 것은 사실이다.

 이슬람의 미술은 과학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슬람교는 우상숭배를 엄금했기 때문에 그림이나 조각은 발달하지 못하고 모스크 건축이 이슬람 미술을 대표했다. 그 건축의 특징인 돔은 역학적 계산에 의해서 설계되었다. 건축의 안팎을 장식하는 도안으로서는 아랍 문자나 화초, 기하학적 문양 등으로 꾸민 이른바 아라베스크 무늬가 발달했다.

 이슬람교의 강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원시 아랍 유목민들의 낭만적 정열과 현세적 기쁨을 가장 뚜렷하게 간직한 것이 그들의 문학이었다. 그들에게는 무함마드 이전에 아라비아의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정열적인 시나 노래가 있었으나 아바스조 이후 페르시아 문학의 영향을 받아 산문이 발달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천일야화인데, 이것은 9세기에 페르시아어에서 번역된 천화를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아라비아적 요소가 가미된 것을 뒤에 카이로에서 완성한 것이라 짐작되고 있다. 학자들 중에는 중세 후기 서유럽에서 널리 퍼진 음유시인들 노래의 근원을 이 천일야화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