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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십자군 원정

by kraneco 2024. 11. 12.

십자군 원정의 계기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 계속된 혼란상태가 끝나 서유럽 사회가 봉건영주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배하에 안정을 되찾고 점차 성장의 길로 들어서게 되자, 서유럽 세계는 그 세력을 외부로 신장하는 기운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동방에서는 새로 셀주크 투르크가 일어나 아바스 왕조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고 소아시아를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빼앗아 직접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서쪽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한때 열세에 몰려 있던 이슬람교도들이 알모라비드 왕조 하에서 다시 힘을 되찾아 아라곤, 카스티야 등 북부 그리스도교 국가들에 대한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7세기 말 이래로 줄곧 공격만 당해 왔던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가 이제는 거꾸로 공세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이래서 일어난 것이 바로 십자군 원정이었다. 이것은 그동안 거듭된 이슬람교도들의 유럽 세계 침범에 대한 하나의 보복전이라 할 수 있으며, 전성기에 접어든 중세 유럽 사회가 밖으로 그 힘을 과시하고 뻗쳐 나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십자군 원정의 직접적 계기를 만든 것은 비잔틴 황제였다. 11세기 후반 셀주크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자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로마 교황 우르반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때마침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싸움에서 우세를 굳히고 있던 우르반 2세는 이를 받아들여 성지탈환의 성전을 일으킴으로써 동서로 갈라진 교회를 다시 통합하여 스스로 그 우두머리가 될 것을 기대했다. 그는 중부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에 대한 셀주크 투르크인들의 박해상을 들추면서 성지회복을 위한 성전을 일으킬 것을 촉구했다. 공의회가 끝난 뒤에도 그는 프랑스 각지를 순회하면서 성전을 호소했고, 다른 열광적인 설교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들의 호소에 감동되어 모여든 군중과 기사들이 저마다 가슴에 붉은 십자 표시를 달고 예루살렘을 향해 떼를 지어 떠났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그 후 13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그중 대규모적인 것만도 7,8회나 조직되었다.

십자군 원정의 부정적 측면

 그러나 이처럼 여러 번에 걸쳐서 수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의 성과는 대수로운 것이 못 되었다. 종교적인 열광으로 성지를 향해 나아간 최초의 십자군은 어렵게나마 성지에 도착해 이를 이슬람교도의 수중에서 탈환하고 여기에 봉건제에 입각한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군 자체의 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슬람교도들의 분열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 후 이슬람교도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그리스도교도들을 공격하자 1187년 예루살렘은 다시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이 이후에도 몇 차례 시도되었으나, 5회 때 역시 이슬람교도들의 내분을 이용해 잠시 성지를 되찾았을 뿐, 예루살렘은 줄곧 무슬림의 지배하에 남아 있었다.

 본시 십자군은 조직화·체계화 되지 않은 군사행동이었다. 위로는 국왕에서 아래로 농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가한 이 원정군은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했으며, 국왕이나 제후 등 지휘자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잦아 통일된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군장비도 각각 다른 데다가 체계적인 훈련도 받지 못했고 군기 또한 엉망이었다. 더욱이 보급망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식량을 비롯한 모든 보급품은 원정 도상의 현지에서 조달해야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오합지중이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제1회 십자군 때 맨 먼저 원정길에 올랐던 농민십자군으로, 이들이 지나간 유럽의 마을들은 그들의 약탈과 방화 그리고 무자비한 살상을 견디어 내야만 했다. 수백 명의 정예기사로 된 구원 병력을 기대했던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는 이 인간 메뚜기의 대군에 놀라 서둘러 이들을 해협 너머 소아시아의 땅으로 호송해 보냈다. 소아시아에 들어간 뒤에도 그들은 저희들끼리 싸우고 그곳 그리스도교도들을 죽이는 일에는 능했으나, 막상 투르크족과의 싸움에서는 대패하여 섬멸당하고 말았다.

십자군 원정의 영향

 그러나 초기의 십자군에게는 종교적 열정만은 넘쳐 있었다. 농민 십자군에 이은 기사 십자군은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거쳐 드디어 성지 예루살렘에 도달했다. 성지를 점령한 그들은 거룩한 땅에 엎드려 입 맞추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수많은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들을 학살했다. 그러나 회가 거듭됨에 따라 점점 종교적 정열마저도 사라져, 정치적 야심이나 상업상의 이해가 오히려 원정의 주된 동기로 되어 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제4회 십자군이었다. 십자군 병사들은 베네치아 상인의 요청에 따라 성지 아닌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해 비잔틴 제국을 넘어뜨리고 그 자리에 라틴 제국을 세웠다. 당시 지중해무역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상인들과 맞서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의 이익을 위해 십자군이 성지회복이라는 그 원래의 목적을 저버렸던 것이다. 십자군은 결국 성지회복이라는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 유럽 세계의 외부 진출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십자군은 성과보다는 오히려 그 영향이 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전성기에 접어든 유럽 세계 힘의 팽창을 표시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계속됨에 따라 점차 중세 유럽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초기에는 성지를 회복하여 그곳에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고, 또 이교도와 싸우는 기사단을 세우는 등 교황의 권위나 봉건기사들의 세력이 한층 높아진 듯했다. 특히 교황의 권위는 십자군에 의해 더욱 올라가 13세기 초엽의 인노켄티우스 3세 때에 교황권은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성지회복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의 종교적 열정도 차츰 식어 가고 교황의 권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 원정의 실패는 이 싸움에서 주동역할을 맡아 가장 많은 희생을 바쳤던 기사 계층의 몰락을 촉진해 봉건제 붕괴의 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십자군에 의해,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던 서유럽인들은 선진지역이었던 이슬람 세계나 비잔틴 제국과의 접촉이 늘어남으로써 그들에게서 큰 영향과 자극을 받았다. 동방과의 접촉은 서유럽인들의 견문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동방무역을 급성장시킴으로써 서유럽의 도시와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이에 수반한 화폐경제의 발달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적이었던 장원경제를 무너뜨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