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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중세 상공업 발달과 길드 형성

by kraneco 2024. 11. 13.

중세 상공업의 발달

 중세 서유럽 사회는 전성기에 접어들면서 자신을 붕괴시킬 요인들이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것은 십자군에 앞서 이미 일어나고 있었던 상공업의 발전과 그에 수반하는 도시의 발달이었다.

 로마 제국의 쇠망과 민족이동의 혼란, 특히 이슬람 세력의 지중해 제패로 중세 초기의 서유럽 세계에서는 상업이 쇠퇴하고 고대 도시가 쇠미하여,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를 위주로 하는 장원이 지배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10세기가 지나면서 이민족의 침입과 그에 따른 혼란이 끝나 사회가 봉건체제 아래 새로운 안정을 되찾게 됨에 따라 자급자족적인 장원경제 안에서도 나름대로 생산성의 향상이 나타나 이른바 잉여생산물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쟁기의 개량, 마력의 이용, 3포제도의 도입 등 농업기술상의 여러 개혁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다.

 사회가 안정되고 농업생산이 늘어나자 인구도 늘어났다. 그러자 종전의 촌락만으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새로운 농장의 개척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래서 인구의 증대가 이번에는 새로운 토지의 개간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어, 이 무렵부터 유럽 각지에 일대 개간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11세기 동안에 넓은 숲과 황무지 등이 개간되어 수많은 새로운 농장과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새로운 토지의 개간이 가져온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중세 장원제의 변모였다. 새로운 토지에 이주할 농노들을 얻기 위해 어떤 지주들은 개간사업에 종사한 농민들에게 일정한 특혜를 부여했는데, 그것은 흔히 농노의 부담을 크게 줄이는 것이었다. 농노 자신이 이러한 새로운 땅으로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장원영주는 이것을 막기 위해 남아 있는 농노에게 비슷한 특혜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리하여 12, 13세기에는 농노들의 부담을 경감하는 것이 일반적 추세가 되었고, 나아가서는 농노신분 자체의 해방까지도 나타나 농민의 자유가 더 늘어났다.

 농업생산과 인구의 증가,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적 유동성의 증대는 교역과 상업의 발달을 자극했다. 남아도는 생산물이 생기게 되자, 이 잉여물의 교환에서 다시 상업활동이 일어났다. 한편 늘어난 인구는 처음에는 새로운 토지 개척사업에 배출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땅 또한 가득 차게 되자, 남아도는 인구는 농업 이외의 다른 직업을 찾아야만 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상업이었다. 이리하여 10세기 후엽부터 11세기에 걸쳐서 서유럽 세계에서는 새로운 상인계층이 광범하게 형성되었으며, 이들의 상업활동 근거지 또는 중심지로서 중세의 도시가 널리 발달했다.

중세 도시의 발달

 상인들은 봉건제후의 성곽 밖이나 주교좌성당 또는 수도원이 있는 고대 도시의 주변, 혹은 수륙교통의 요지 등에 자리 잡아 이곳을 그들의 일상생활과 상업활동의 근거지로 삼았으며, 상인의 뒤를 이어 장원 안에 있던 수공업자들도 모여들게 되었다. 이래서 본래의 성곽이나 주교도시 또는 수도원도시의 주변에 이들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거주하는 새로운 지구가 형성되고 이를 둘러싸는 새로운 성벽이 구축되었다. 중세 도시는 이렇게 형성되었는데, 그것이 고대 도시와 다른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후자의 주민들이 토지소유자층을 주축으로 한 데 대해 전자에서는 본래의 중심성곽의 밖이며 새로운 성벽의 안에 거주한 이들 상공업자층이 성곽의 주민, 즉 시민으로서 도시 주민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처음 도시 상업활동의 범위는 주변 농촌을 대상으로 하는 좁은 지역에 지나지 않았으나, 노르만 상인이나 아랍 상인의 활동에 자극되고, 특히 십자군의 영향으로 교통로가 발달함에 따라 교역범위가 넓어져 점차 원거리 무역이 번창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항국도시는 일찍부터 이슬람 상인들과 맞서 싸우면서 지중해 무역에 종사해 왔는데, 11세기 말엽 노르만 기사들이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함에 따라 지중해의 지배권은 다시 이슬람의 손에서 그리스도교도들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십자군 원정으로 이들 도시 상인에 의한 동방무역은 한층 더 활발해졌다. 그들은 아시아에서 후추를 비롯한 향료, 비단 등 사치품을 들여와 이를 프랑스, 독일 등지에 넘기고 그 대가로 독일산 은을 지불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들 항구도시 이외에 밀라노와 피렌체 등 내부도시도 직물업이나 상업으로 번영했다.

 이탈리아에 이어 원거리 무역이 번창한 지역은 브루게, , 이프로 등을 중심으로 하는 플랑드르 지방과 뤼베크, 함부르크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독일 지방이었다. 이 북부유럽 지역의 무역에서 주요 상품은 플랑드르산 모직물이었다. 플랑드르는 중세 유럽에서 아마 가장 먼저 공업이 발달한 지역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무렵 저지대의 거의 모든 주민들은 어떤 형태로든 이 모직물 공업과 관련되어 있었다. 플랑드르의 상인들은 이것을 유럽 각지에 팔았으며, 그 원료인 양모를 주로 영국에서 들여왔다. 한편 북부독일 상인들은 북해와 발트해에서 나는 해산물, 목재, 가죽 등을 서유럽에 넘기고 이 지역에 역시 플랑드르산 모직물을 가져다 주었다.

 북부유럽 무역권과 지중해 무역권을 연결하는 유럽 내륙지방에도 도시가 발달하고 상업이 번창했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동북부 샹파뉴 지방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플랑드르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만나는 지역으로서, 이 지역의 여러 도시에는 대규모적인 정기시가 열려 유럽 각지의 상인들이 몰려와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중세 도시는 새로 건설된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고대 도시의 자리나 국왕, 봉건제후 또는 주교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여 발달했다. 그들은 자기의 영내에 도시가 발달하는 것을 환영했다. 그것은 도시가 생기면 시장세, 상품세 등을 징수할 수 있고, 또 도시에 대한 재판권 행사나 각종 인가를 통해서도 수입을 올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도시의 주민들도 처음에는 이들 영주에게 예속되어 각종 봉건적 의무와 속박 아래에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경제활동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상인들의 주도 아래 도시공동체를 형성하여 영주의 예속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 그들은 흔히 영주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불함으로써 영주로부터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는 특허장을 얻어 내는 방법을 택했으나, 때로는 힘으로 싸워서 이를 획득하기도 했다.

 11세기 초에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와 피사의 두 도시가 일찍부터 자치도시국가로 되어 있던 베네치아를 따라 자유를 얻게 되고, 12세기까지는 유럽 각지의 도시들이 자치권을 얻게 되었다. 그들이 얻은 자유에는 차등이 있어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도시의 주변을 포함하는 상인 중심의 독립적인 도시국가가 되는가 하면, 독일에서는 황제 직속의 자유도시가 되어 봉건영주와 맞서는 유력한 도시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봉건영주의 보호하에 납세의 의무를 지는 자치도시가 되었다.

 이처럼 도시의 주민들은 비록 도시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그 나름대로 자유를 누렸다. 이것은 장원의 농민에게는 부러운 일이었으며, 그들 중에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시로 도망쳐 오는 자들이 나타났다. 도시들은 대개 이렇게 도망쳐 온 농노가 도시 안에서 1년과 하루만 넘기면 자유민이 될 수 있게 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이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게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길드 형성과  발전

 그러나 중세 도시의 주민들이 누린 자유는 근대 사회의 시민들이 누리고 있는 것과 같은 개인의 자유는 아니었다. 그것은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이 단결하여 도시의 지배자인 영주로부터 얻어 낸 그들 자신의 집단적 자유였다. 시민들은 그들이 획득한 특권적 자유를 그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확장하기는커녕, 이를 독점하기 위해 배타적인 조직체를 만들었다. 이것이 곧 길드, 즉 동업조합이었다.처음에 형성된 것은 상인길드였다. 상인들은 도시의 지배자였던 성속의 봉건영주에 대한 도시공동체의 투쟁이나 대결에서 앞장섰으며, 자치권을 얻은 뒤 시정을 운영해 나가는 데서도 주도권을 장악했다.

 수공업자들도 처음에는 상인길드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점차 상업과 공업의 분화가 뚜렷해지면서 시정의 실권을 독점한 대상인들의 과두지배에 반기를 들고 상인길드에서 분리하여 직종별로 맞서 싸우면서 점차 시정에도 참가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싸움은 특히 독일 도시에서 치열했다. 수공업 길드의 구성원은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가게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도제를 기르고 직인을 사용하여 생산에 종사했다. 도제는 그 직종의 기술을 배우는 견습공이었으며, 직인은 일정한 도제 기간을 마친 후 임금을 받고 생산에 종사하는 직공이었다. 기술을 연마한 직인이 길드가 정한 규격에 맞는 작품을 만들어 그 심사에 통과하면 독립된 가게의 주인으로서 자립하여 길드의 일원이 될 자격을 얻었다.

 주인과 직인, 그리고 도제 사이에는 이렇듯 엄격한 신분적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길드의 멤버들 사이에서는 평등이 존중되었다. 그와 동시에 길드는 원료·기술·제품의 규격과 품질·가격, 심지어는 노동시간까지를 규제함으로써 생산의 통제와 기술수준의 유지를 꾀하여 길드 멤버 사이의 자유경쟁을 막고 시장의 독점을 꾀했다. 이 밖에도 길드는 길드 멤버들의 공동이익과 상부상조를 위한 여러 가지 제도와 규칙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들은 그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성격 때문에 점차 경제의 자유로운 발전에 장애가 되어 갔다.

 공동이익과 상부상조를 위한 공동조직은 한 도시 안의 상공업자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도시들 사이에서도 형성되었다. 여러 도시들이 동맹하여 공동의 이해를 위해 싸워 나간 것이다. 이러한 도시동맹으로서는 북부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 사이에 결성된 롬바르디아 동맹과 북부 독일의 여러 도시로 구성된 한자동맹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한자 동맹은 14세기에는 한때 100에 가까운 가맹시를 거느려, 해로로는 발트해의 해산물이나 목재, 영국의 양모를 나르고 육로로는 이탈리아와 교역하여 북부유럽의 상권을 잡았다. 한자 동맹은 경제적으로 번영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강력하여 자신의 깃발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나라와 조약도 체결하고 전쟁도 하는 등 마치 하나의 독립국가처럼 행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