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세력의 쇠퇴
12, 13세기에 걸쳐 중세 유럽인들의 생활과 문화에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교회의 세력도 13세기가 지나면서부터 차츰 쇠퇴의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교회와 세속군주와의 싸움을 통해 로마 교회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지배기구로서 세속화한 데다, 십자군의 실패로 민중의 신앙심이 식어가고, 봉건제후와 기사들의 세력이 약화하여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교황과 교회의 권위가 떨어져 갔기 때문이다. 13세기 말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영국과 프랑스의 왕과 성직자에 대한 과세권을 두고 다투다가 실패하고, 이어 14세기 초에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성직자에 대한 재판권을 가지고 싸웠으나 마침내 왕에게 붙잡혀 굴욕 속에 죽었다. 이때 국왕에 의해서 소집된 삼부회에서 프랑스의 성직자들은 귀족·평민의 대표자들과 함께 국왕을 지지하여 교황의 프랑스 교회에 대한 간섭을 배격했는데, 이로부터 프랑스 교회의 갈리카니즘, 즉 교황보다 국왕의 통제를 받는 국민적 교회를 세우려는 운동이 싹튼 것이다.
그 후 로마 교황청은 필리프 4세에 의해 남부프랑스의 아비뇽에 옮겨져, 이후 약 70년간 교황이 프랑스왕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됨에 따라, 유럽 각국에서 교황의 권위는 한층 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고대 유대인들의 바빌론 유수에 비겨 ‘교황의 바빌론 유수’라 불렀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주장에 따라 14세기 후엽에 로마 교황청은 다시 로마에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이에 대항하여 아비뇽에서도 교황이 서게 되어 로마와 아비뇽의 두 교황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여 싸우게 되었다. 이것이 곧 교회의 분열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교황의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교황의 권위가 떨어진 것과 함께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의 타락과 부패도 심해졌으며, 이에 따라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는 소리도 점차 높아갔다. 그 중에서도 옥스퍼드 대학의 위클리프는 교황과 성직자의 타락을 비난하고 교회의 의식이나 교리가 성경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고 공격함과 동시에 영국 교회의 교황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결국 이단으로 몰려 금지되었으나 여전히 이를 따르는 자도 많았다. 이들은 교회의 착취와 부유화에 반대하는 일종의 사회운동 추진자가 되었다.
위클리프의 교리는 대륙에까지 전파되었으며, 그 중 뵈멘의 후스는 그의 저술을 공부하여 그와 비슷한 교회 개혁 이념을 주장했다. 후스는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끝끝내 자신의 주장을 버리지 않아 이단으로 몰려 분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후스파의 반항운동은 오래 계속되었으며, 이 운동에는 뵈멘의 민족적 애국심이 엉켜 있었다. 후스의 화형을 결정한 콘스탄츠 공의회는 로마 교황의 정통성을 인정하여 일단 교회분열을 끝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교회의 부패는 여전했으며, 이에 대한 개혁운동도 끊임없이 계속되어 마침내 근세초의 종교개혁을 유발하기에 이르렀다.
중세 유럽의 쇠퇴
아울러 중세 유럽 세계의 쇠퇴현상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농업생산의 증대,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 인구의 증가 등 12세기 이래 계속된 사회·경제적 발전이 13세기 말을 전후하여 점차 퇴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삼림의 개간과 늪지의 간척 등 경작지의 확대가 한계점에 도달했으며, 지력의 고갈, 적절한 시비방법의 결여, 부역노동의 비효유성 등으로 농업생산력은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무렵부터 인구의 감소 현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14세기 중엽에는 흑사병의 대유행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감소했다. 이에 따라 곡물 수요가 크게 줄어 가격이 떨어진 반면, 농업노동력은 크게 부족하여 임금이 올라갔다. 이제까지 농경에 이용되던 많은 땅들이 버려진 채 황무지나 풀밭으로 바뀌고 여러 마을의 가옥들이 비어진 채 폐허로 변해 유럽 농촌은 이른바 ‘봉건적 위기’의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그동안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여 여러 재화의 교역이나 화폐의 사용이 늘어나자 장원영주들의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이에 따라 그들의 수입 증가에 대한 욕구는 오히려 더욱 늘어나 있었다. 이러한 영주들이 농업상의 위기에 당면해 우선 택한 길은 농민에 대한 압력을 가중하여 그들의 부역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봉건적 반동’ 또는 ‘제2의 농노제’라 불린 이러한 부역강화는 토지가 넓은 데 비해 노동력이 희소했던 엘베강 동쪽지방에서 특히 두드러진 현상이었지만, 13세기 영국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영주들의 농민에 대한 압박의 가중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어었다. 부역의 강화는 장원으로부터 많은 농민들의 도망을 유발했다. 특히 도시의 자유로운 공기는 농민의 도망을 더욱 자극하고 또 가능하게 했다.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임에도 도망친 농노들을 붙들어 와서 부역노동을 강요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농민들이 자기 영지에서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오히려 농민의 부담을 경감하고 그들의 신분적 속박을 완화해 주는 길을 택했다. 영주들 자신들로도 화폐에 대한 요구가 늘어난 데다 비능률적인 부역노동에 의한 직영지의 직접경영보다는 화폐지대를 받는 토지임대를 오히려 바라기도 했다. 이래서 영주들은 농민의 부역을 폐지하고 직영지를 분할하여 이를 농민에게 대여함으로써 지대를 생산물 또는 화폐로 받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이것이 곧 부역의 생산물 지대화 또는 금납화인 것이다.
이처럼 부역에서 해방된 농민들은 이제 자기 자신을 위한 생산에 더욱 주력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물가상승으로 화폐가치가 떨어지게 되자 일정액의 화폐지대를 바친 농민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그만큼 그들의 생활도 향상되었으며, 그러는 가운데 농민 중에는 독립적인 자영농민의 지위로 상승한 이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농민의 부역으로부터 해방과정은 오랜 시일을 두고 진행되었으며, 그 시기나 양상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가장 빨랐던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 말까지 거의 끝났으나, 다른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15세기 말경에 이르러서야 부역노동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길 또한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처지가 어려워진 영주들은 어떻게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여 다시 지대를 올리거나 농민의 신분적 속박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자 이미 어느 정도 지위가 향상되어 있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반항했다. 14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일어난 자크리의 반란이나 영국에서 일어난 와트 타일러 등이 바로 그 대표적 보기이다. 주로 농노제의 폐지와 무거운 세금의 경감을 요구하고 일어난 폭력적인 농민반란은 지도자의 지도력 부족과 농민들의 조직력 결핍으로 결국 영주들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지만 그것으로 농민의 해방이 촉진된 것만은 틀림없다.
길드의 대립분쟁
경제적 후퇴에 수반한 사회불안과 대중반란의 양상은 도시에서도 일어났다. 흑사병에 의한 인구감소는 도시에서 더욱 심했으며, 이것은 상품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킴과 동시에 노동인구의 감소, 그리고 그에 따른 임금의 상승을 가져왔다. 이에 대해 상공업자들은 노동인구의 이동을 막고 임금의 상승을 억제하는 등 길드의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직인 노동자들의 불만을 자아냈다. 한편 길드 상호간에도 대길드와 소길드 사이, 상인길드와 수공업길드 사이 또는 주인들의 길드와 직인들의 길드 사이에 대립분쟁이 심해져 14세기에는 유럽 각지의 도시에서 대중폭동이 일어났다. 14세기 초엽에 플랑드르 지방에서 일어난 여러 반란, 14세기 중엽에 로마에서 일어나 ‘로마 공화국’까지 세웠던 반란, 그리고 14세기 말엽에 피렌체에서 직물업 직공 중심으로 일어난 치옴피의 반란 등이 바로 그 보기들이다. 농민들의 반란이 농노제의 속박에 반항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 도시민들의 반란은 길드제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지도력과 조직력의 부족으로 결국 진압되고 말았으나, 이것이 길드제의 기틀을 흔들어놓은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14, 15세기 유럽 세계는 대체적으로 이처럼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쇠퇴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그 속에서 장차 유럽 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올 새로운 요소들, 즉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농업이나 상공업의 위기적 상황을 이겨 내거나 이용하면서 상인이나 은행가들과 같은 부유한 사람들은 광업, 공업, 상업, 금융업 등 경제활동의 거의 모든 분야에 손을 뻗침으로써 그들의 부를 더욱 늘렸다. 프랑스의 자크 쾨르나 피렌체의 메디치가, 또는 독일의 푸거가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길드 체제하의 상공업자들처럼 자급자족적인 지방적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생산하거나 거래하기보다는 원거리에 있는 세계시장을 위해 대규모적인 생산과 교역에 종사했다. 비록 기술상의 큰 혁신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그들은 대량의 원료와 대규모적인 분업노동을 이용하는 이른바 ’선대제도‘를 채택해 상품의 대량생산을 실행했으며, 환이나 어음 등의 신용제도를 이용함으로써 대규모 원거리무역을 용이하게 했고, 복식부기에 의한 기장법을 개발해 기업을 더욱 합리적으로 운영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 대은행가들은 점차 국왕이나 교황에 대해서 정치 자금이나 군사자금을 대는가 하면 피렌체의 메디치가처럼 스스로 정치적 지배자가 되거나 교황이 되기까지도 했다. 도시에서의 상공업과 화폐경제의 발달은 장원제와 길드제에 입각한 자급자족적인 봉건경제를 타파함과 동시에, 토지에 대신하는 새로운 부의 형태를 탄생시켰다. 국민국가의 형성과 르네상스 등 근대 유럽의 새로운 운동은 바로 이 같은 힘의 성장과 더불어 자라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