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형성
교회와 봉건영주들이 지배하고 있던 중세 유럽에서는 국왕의 권력이 별로 강력하지 못했다. 비록 형식상으로는 봉건체제의 정점을 차지해 봉건 제후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었지만 개별 영지 안에서의 행정, 사법, 징세, 군사 등 통치의 실권은 봉건제후의 수중에 있어 국왕이 함부로 이에 간여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13세기 말경부터 교회세력이 쇠퇴하는 한편, 장원제의 기틀이 흔들려 봉건영주들의 힘이 약화되기 시작하자 상대적으로 국왕권의 강화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국왕은 종전에 봉건제후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던 사법, 행정, 징세, 군사 등의 여러 권한을 다시 찾아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 하려고 노력했다. 국왕은 지방적 할거와 봉건적 분열을 극복하고 국토의 통일을 위해 관료제도를 정비하고 상비군제도를 마련하려 했으며, 여기에 소요되는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 발흥하는 도시의 상공업자층을 끌어들여 국가 단위의 통일적 재정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나 영토적 통일과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근대적 국민국가의 형태가 이 무렵과 바로 성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또 시민층과 제휴한 왕권의 강화로 봉건제후들의 세력이 이 무렵에 완전히 몰락한 것도 아니었다. 이때 성립된 것은 16세기 이후에 절대주의 국가가 성립될 때까지의 과도적 형태로서의 이른바 신분제 국가였다. 그것은 성직자, 봉건영주, 그리고 시민이라는 세 신분의 바탕 위에 세워진 왕조국가였다. 당시 국왕의 재정수입을 늘리기 위해 소집된 신분제 의회는 성직자, 봉건영주, 시민대표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 의회를 통해서 국왕은 과세에 대한 국민의 협찬을 얻어 필요한 재정수입을 확보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초에는 이처럼 국왕에 대한 협찬기관으로서 국왕에 의해 소집된 의회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차 왕권에 대한 제약기구의 구실을 하게 되자, 국왕은 차츰 그 소집을 꺼리게 되어 신분제 의회를 무력화하고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리하여 15세기 말엽에는 서유럽의 몇몇 지역에 절대군주제의 중앙집권적 국민국가가 성립됐다.
대헌장, 영국 입헌 정치의 기초가 되다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성립에 앞장선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에서는 1066년 윌리엄의 정복 이래 노르만 왕조의 지배하에 강력한 왕권을 수반한 예외적인 봉건제가 발달했다. 정복왕은 영국 내의 모든 앵글로-색슨 귀족에까지 국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시키고, 조세징수를 위한 토지대장을 작성하는 등 강력한 국가체제를 확립하는 데 힘썼다. 그 후 노르만 왕조를 이은 플랜터지네트 왕조의 헨리 2세는 보통법의 개정과 재판제도의 개혁으로 집권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존 왕은 프랑스 내의 영국령 문제를 두고 프랑스 왕과 다투어 많은 영토를 잃고, 교황과 맞서 싸우다 패배하여 교황에게 신서를 하는가 하면 국내에서도 고압적인 지배로 귀족들의 반항에 부딪쳤다. 1215년 귀족들은 국왕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파기하고 63조의 요구조항을 제시하여 그에게 이를 승인하도록 강요했다. 이것이 곧 『대헌장』으로 알려진 문서인데, 이것은 주로 봉건귀족들의 특권적 권리를 국왕에게 확인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국왕이라도 법을 지켜야 하며, 또 지키게 할 수 있다는 근본원리를 확인한 것으로 이후 영국 입헌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그 뒤 1265년에는 시몽 드 몽포르가 제후들과 함께 국왕 헨리 3세에게 『대헌장』의 재확인을 강요한 후 그 자신이 세운 정부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대회의에 도시와 주의 대표를 참여하게 함으로써 영국 의회의 시초를 만들었다. 영국 의회의 전통은 1295년 에드워드 1세가 이른바 모범의회를 소집함으로써 확고해졌으며, 14세기에는 귀족원인 상원과 평민원인 하원으로 갈라져 양원제가 자리 잡히고 법률의 제정, 과세에 대한 의회의 동의권 등이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서유럽의 국민국가 형성
영국과 프랑스 양국이 중앙집권적인 국민국가로 발전하는 데 획기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백년전쟁이었다. 프랑스 내 영국령의 문제와 플랑드르 지방의 모직물 공업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대립과 카페 왕조의 뒤를 이은 발루아 왕가의 왕위계승권에 대한 영국왕의 시비를 계기로 하여 일어난 이 전쟁은 처음에는 영국과 프랑스 두 왕가 사이의 봉건적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양 국민 사이에 민족의식이 앙양되어 싸움은 점차 국민국가 간의 전쟁으로 변모해 갔다. 특히, 전쟁 후반기에 땅에 떨어진 프랑스군의 사기를 고취하여 전세를 역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잔 다르크의 출현은 프랑스인들의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크게 불러일으켜 프랑스 국민국가 형성의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
영국에서는 15세기에 들어오면서 한때 유력한 제후들의 힘이 강화되어 이른바 의사 봉건제도의 현상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백년전쟁으로 프랑스 내의 영국령을 잃음으로써 국왕의 관심이 오히려 잉글랜드에 집중되었다. 게다가 잇달아 일어난 왕실 내부의 왕위쟁탈전인 장미전쟁을 겪는 동안에, 여기에 휘말린 봉건제후들의 세력이 큰 타격을 받았다. 이리하여 1485년 헨리 7세의 튜더 왕조 하에서는 국왕의 권한이 크게 신장되어 장차 강력한 국민국가로 발전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대서양 연안의 서부유럽 여러 나라들과는 달리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국민국가의 통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0세기 말엽부터 11세기에 이르는 신성로마 제국 초기의 독일에서는 역대 황제들이 제후들의 세력을 눌러 왕권강화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나 광대한 지역에 할거한 수많은 대소 봉건 제후들의 분립상태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고대 로마 제국의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한 독일 제국의 황제들이 계속 이탈리아 경략에 몰두해 본국의 통치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제후들의 세력은 여전히 강대하여 봉건적인 지방분권체제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3세기 후반에는 정통의 황제가 존재하지 않은 대공위시대까지 나타나 황제권이 더욱 약화되더니, 1356년에는 드디어 황제 카를 4세가 이른바 『황금문서』를 발포함으로써 황제는 성·속의 7선제후에 의해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황제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게 되고, 제국 통치의 실권은 성·속의 많은 대소 제후와 자치도시 등 약 300의 지방분권적 세력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그중 유력한 몇몇 제후들은 자기 나름대로 영토를 확장하고 권력을 집중해 갔다. 이래서 독일에서는 중앙집권적 국가형성이 민족단위가 아니라 지역단위로 추진되었는데, 이것이 곧 연방국가인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도 형편은 비슷하여 중부의 교황령 이외에 북부에는 베네치아와 피렌체의 두 공화국과 밀라노 공국이, 남부에는 나폴리 왕국 등 여러 제후국과 도시국가가 분립한데다가 외세의 간섭과 내부적 당파싸움까지 겹쳐 좀처럼 국가통일의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와 독일이 근세 초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 빛나는 정신적 혁신운동을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유럽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후진국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이처럼 국민국가의 통일에서 뒤쳐졌다는 점이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