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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로마의 건국과 발전

by kraneco 2024. 11. 1.

로마의 건국

 서양 고대사를 달린 첫 주자가 그리스인들이었다면, 이들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은 제2의 주자는 로마인들이었다. 릴레이 경주에서 선 주자와 후 주자는 한동안 트랙을 함께 달리면서 바통을 건네주고 건네받듯이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도 한동안 함께 달리면서 서양 고전 문명의 전통을 넘겨주고 넘겨받았다. 서양 고대사에서 로마인들이 활동하기 위해 시작한 것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마케도니아의 지배하에 들어간 기원전 4세기 말엽부터가 아니라, 아테네가 민주개혁을 이룩하고 그 전성기에 접어들게 시작하던 기원전 6세기 말엽부터의 일이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가 나라를 세웠다는 로마의 건국 설화에 의하면 로마의 건국은 기원전 753년의 일로 되어 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로서 어느 정도로 정확한 것인지는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 다만 기원전 8세기경에 인도-유럽어계에 속하는 이탈리아인의 일파인 라틴족들이 티베르강 하류 지역에 정착하여 작은 도시를 이루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이 당시 이탈리아반도의 북쪽에는 에트루리아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남쪽에는 그리스인들의 여러 식민도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로마보다 앞선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 에트루리아인들은 아마도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외래 침입자들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들은 기원전 7세기 동안에 반도를 남하했으며, 기원전 6세기 초에는 로마도 이들에게 정복당하여 한때 그들 왕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라틴족들은 이 외래인의 지배에 반항하고 다른 라틴족들과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6세기 말에는 에트루리아계의 왕을 내쫓고, 그들 자신의 독립된 공화국을 세웠다. 장차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제국을 형성하고 고전 그리스 문화를 이어받아 서양 고대 문화를 완성한 고대 로마인들의 역사적 활동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원로원

 일개 조그마한 폴리스에 불과했던 로마가 그렇게 광대한 지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가 무엇보다도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16세기에서 65세까지의 모든 시민에게 군 복무의 의무가 부과되었으며, 그들은 제각기 재산 능력에 따라 종류가 다른 백인대에 편성되어 시민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로마인들은 자신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한 종족이었던 에트루리아인들과의 싸움을 통해서 그들 자신의 폴리스를 세웠다. 폴리스가 형성된 뒤에도 이들과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북쪽에 침입한 켈트인과의 싸움, 남쪽 라티움 여러 도시나 삼니움인들과의 싸움, 그리고 반도 남쪽의 마그나 그레키아의 그리스 식민들과의 싸움을 통해서 이탈리아반도에서 그들의 지배권을 확대해 나갔다. 이처럼 로마의 팽창은 시민군을 바탕으로 하는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서 성취되었고 또 그것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도 처음에는 군대의 주축을 이룬 것은 기마를 갖출 수 있었던 귀족들이었으며, 따라서 폴리스 정치의 실권 또한 처음에는 이들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치가 실시되자 왕 대신에 임기 1년의 집정관 2명이 선출되어 이들이 공동으로 국정을 담당했다. 그 임기는 6개월 이내로 제한되어 있었다. 집정관은 전체 시민들, 즉 전체 병사들의 모임인 병원회에서 선출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귀족만이 이에 선출될 수 있었다. 게다가 로마 공화국에서 사실상의 최고 의결 기관은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이었다. 원래 씨족장들로 구성되었으며 후에는 전직 고위 관직자들이 그 의원으로 지명된 원로원은 공화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기구였다. 집정관이나 그 밖의 관직자들이 법적으로 원로원의 의견에 구속받지는 않았지만, 로마의 정치적 경험과 지혜의 결정체였던 원로원의 의견에 감히 거역하려는 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호민관

 그러나 로마 군대에서는 처음부터 귀족들 이외에 평민들의 역할도 중요했다. 그중에서도 소위 중장보병으로 복무한 부유한 평민들의 역할은 컸으며, 이들은 공화국 성립 초부터 이미 귀족들과 더불어 군대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래서 로마에서는 공화정 초기인 기원전 5세기 초부터 벌써 평민들이 귀족의 정권 독점에 반대하여 투쟁하게 되었다.

평민들이 사용한 최초의 투쟁 방법은 일종의 스트라이크였다.

 기원전 494년 전쟁을 위해 소집된 평민의 군대는 이른바 성산에 집결하여 그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로마에서 분리하여 따로 자신들의 폴리스를 세울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에 귀족들은 양보하여 평민들만의 집회인 평민회의 조직과 평민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호민관의 선출을 인정했다. 이어 기원전 5세기 중엽에는 이제까지 귀족층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어 오던 법률의 성문화가 실현되었는데, 이것이 유명한 12표법이다. 4년 후에는 귀족과 평민 간의 통혼이 인정되었고, 다시 기원전 4세기 중엽에는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에 의해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은 평민 중에서 나오도록 정해졌다. 그 후 3세기 초까지에는 다른 여러 관직도 평민들에게 개방되었고 이에 따라서 원로원에도 평민이 참여하게 되었다. 기원전 287년의 호르텐시우스법은 이러한 평민 권리 신장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 법에 의해 평민회의 결의는 병원회나 원로원의 인준 없이도 법률로서 발효하게 되었다.

 이로하여 로마에서는 기원전 3세기 초엽까지에 평민들이 형식상 귀족들과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렇듯 귀족과 평민 간의 투쟁이 타협으로 해결되어 평민의 정치참여권이 늘어난 것도 이탈리아반도 정복전에서 그들의 군사적 공헌이 그만큼 요청되었고, 또 그만큼 컸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북쪽의 삼니움인들과 에트루리아인들, 그리고 남쪽의 마그나 그레키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을 완전 정복함으로써 로마가 이탈리아반도의 통일을 완성한 것이 호르텐시우스법이 제정된 10년 남짓 후의 일이었던 까닭도 쉽게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