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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중해 세계 통일

by kraneco 2024. 11. 2.

포에니 전쟁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의 충돌을 가져왔다. 충돌은 시칠리아에서 비롯되었는데, 로마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시를 지배하게 되면서 오랫동안 시칠리아에서 그리스인들과 맞서 온 카르타고인들과 충돌하게 된 것이다. 기원전 264년부터 146년까지 100여 년 동안에 전후 3차에 걸쳐 일어날 포에니 전쟁은 이렇게 해서 일어났으며, 이 전쟁의 결과 로마는 서부지중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본시 페니키아의 식민시로 시작되었으나, 모도시가 망한 후에도 존속하여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고 시칠리아의 일부와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등을 영유하는 해상상업국가로 번영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로마는 본래 농업국가로서 토지소유농민의 중장보병을 근간으로 하는 육군국이었다. 시칠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양국의 싸움은 오랫동안 끌었으나, 카르타고인들은 결국 시칠리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래서 시칠리아는 로마 최초의 속주가 되어 로마 총독에 의해서 통치되고 로마에 세금을 바치게 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에게 더욱 큰 시련이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로 침공하여 도처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 특히 칸네에서의 대패 이후 로마군은 카르타고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게 되었다. 카르타고인들은 반도 내의 로마 지배하의 도시나 동맹도시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봉기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들은 카르타고인들의 지배보다는 로마인들의 지배를 택하여 로마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그동안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본토를 급습했으며, 급보를 받고 귀국한 한니발을 자마에서 패배시켰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들에게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강요했다. 카르타고는 에스파냐령을 로마에게 양도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철저하게 군비를 축소당했다. 이리하여 이제 서부지중해 세계에서 로마에 맞설 세력은 없게 되었다. 그 후 반세기 만에 일어난 제3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의 급속한 부흥을 염려한 로마가 스스로 조작해 낸 구실을 내세워 억지로 일으킨 전쟁이었다. 카르타고는 2년 동안 필사적인 방어전을 폈으나, 마침내 성은 함락되어 도시 전체는 파괴되고 주민은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리게 되었다. 이후 카르타고의 영토는 로마에 귀속되어 아프리카 속주로 불리게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로마는 카르타고와 싸우는 한편 동부지중해에도 진출했다. 기원전 215년부터 146년까지 전후 4차에 걸친 마케도니아 전쟁을 통해서 로마는 카르타고 편에 가담한 마케도니아를 정복하여 속주로 만들고, 또 그리스인들의 반로마 동맹을 분쇄하여 그리스 역시 속주로 만들었으며, 기원전 133년에는 소아시아까지 지배했다. 이리하여 기원전 2세기 말경까지에 로마는 동서지중해에 거대한 해외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영토지배는 로마에 행복한 결과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해외령에서 들어온 공납으로 로마가 부유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이득을 얻은 것은 속주를 지배한 총독, 속주의 공납업무를 맡은 징세청부업자, 군납업자 그리고 정복지를 사점한 유력자 등 로마 시민 중의 부유층이었다. 이들 중에는 기원전 3세기까지의 평민권의 신장으로 정계에 진출한 부유한 평민들도 있었으며, 이들은 종전의 귀족과 합류하여 새로운 귀족, 즉 노빌레스 계층을 형성했다.

 이와 반대로 해외에서의 오랜 군복무로 말미암아 중소농민 중에는 농지경영을 계속할 수 없어 토지를 팔고 무산자가 되어 로마시로 흘러들어오는 자의 수가 늘어났다. 유력자들은 이들의 토지를 매점하기도 하고 공유지를 선취하기도 하여 대토지를 사유화하고, 여기에 또한 전쟁의 결과 얻은 많은 노예를 투입하여 노예제에 입각한 대농장, 즉 라티푼디움을 경영했다.

 이처럼 소수 유력자들의 부가 증대한 반면 많은 농민이 몰락하여 빈부의 차가 심해지는 것은 사회문제일 뿐만 아니라 군대의 주력을 중장보병의 시민, 즉 토지소유 농민층에 의존하고 있던 로마로서는 이러한 농민층의 몰락은 중대한 군사력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133년과 123년의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라는 두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시도는 부호들의 공유지 점유면적을 제한하여 여기에서 얻은 토지를 빈민에게 분배함으로써 토지소유 농민을 재생시키려 한 것이었다.그러나 그들은 귀족층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형 티베리우스는 학살당하고 동생 가이우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라쿠스 형제의 횡사는 그 후 100년에 걸친 내란의 시작을 알리는 경종이었다. 내란의 씨는 마리우스의 병제개혁에 담겨 있었다. 기원전 113년 로마군은 게르만인들과 싸움에서 계속 참패했는데, 이것은 중장보병 농민 몰락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평민 출신의 마리우스는 빈민들에게서 지원병을 모집해 이들에게 무장을 갖추어 군단을 편성하고 이것으로 겨우 게르만인들을 물리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원병, 즉 직업군인으로 군대를 구성하는 새로운 병제는 이들 병사와 이들에게 무장을 지급한 장군과의 개인적 결합을 낳게 하여 군대는 점차 이들 장군들의 사병이 되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사병화한 군대를 배경으로 군인정치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정권 싸움은 곧 군사적 대결, 즉 내란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삼두정치

 내란은 소아시아, 시리아, 갈리아, 이집트 등을 정복한 장군들의 외정과 서로 얽혀 일어났지만, 다른 한편으로 로마의 내부적인 혼란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 이탈리아의 로마 동맹시들이 로마 시민권을 요구하여 일어난 동맹시전쟁이나 유명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등 여러 노예반란 등은 군인정치가의 등장을 촉진했다. 대외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거나 동맹시의 반항과 노예의 반란을 진압한 장군들은 사병화한 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처음 그들은 벌족파와 평민파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던 지배층의 싸움에 끼어들었는데, 그들의 군사력 앞에 원로원이나 평민회가 무력해져서 차츰 그들 자신이 직접 정권을 잡게 되었다. , 기원전 80년대에 평민파의 마리우스와 벌족파의 술라는 각기 사병화한 군대를 이끌고 서로 싸웠다. 기원전 60년에는 평민파인 카이사르와 대부호인 크라수스, 그리고 동부지중해의 해적 토벌과 서아시아 원정으로 공을 세웠으나 원로원과 사이가 나빠진 폼페이우스의 세 시력자가 서로 제휴하여 이른바 삼두정치를 실시했다.

 이때 갈리아 총독으로 지명된 카이사르는 그 후 8년간의 정복전쟁을 통해서 이 지역의 켈트족을 평정했는데, 이를 질시한 폼페이우스가 원로원과 결탁하여 그의 세력을 누르고자 함에 양자가 대립하게 되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마침내 그의 군단을 이끌고 로마에 진군하여, 폼페이우스를 넘어뜨리고 독재권을 확립하여 빈민문제의 처리, 속주통치의 개선, 세제의 개혁 등 여러 치적을 올렸다. 그러나 그는 원로원의 권한을 경시하는 등 전제군주제를 꾀한다 하여 브루투스 등 공화정 수호자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로마는 또다시 내란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안토니우스 등과 손을 잡고 제2차 삼두정치를 시작했으나 곧 이들 사이에 대립이 생겼다. 그러는 가운데 레피두스가 먼저 물러나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대결하게 되었는데,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탁한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의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대패하여 로마의 패권은 옥타비아누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근 1세기 동안에 걸친 내란이 끝나고 오랜만에 야누스의 문이 닫히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공화정의 회복을 구호로 내세웠던 그는 기원전 27년 전시에 돌려줌과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라(존엄자)라는 칭호까지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로마 제일의 시민(원수)으로 자처했다. 이렇듯 그는 공화정의 외형을 그대로 살려두려고 하면서, 권사권과 재정권을 비롯한 통치의 실권은 자기 수중에 확보했다. 그는 군대가 그에게 바친 임페라토르란 칭호를 끝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가 시작한 원수정은 실상 이러한 군사력에 입각한 독재적 군주정이었다. 역사가들이 이 시기부터를 제정시대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