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평화
옥타비아누스가 통치한 40여 년 간은 로마가 오랜 전란에서 벗어나 태평성대를 누리고 로마 문화가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그는 외정에서 수비로 방향을 돌려 국경방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세제개혁, 속주통치체제의 정비, 공공사업의 추진 등 내치에 힘써 “벽돌의 도시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만들었다고 스스로 자랑했다. 이후 약 200년 동안은 처음 칼리굴라나 네로와 같은 폭군이 나오기도 했으나 1세기 말엽부터는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5현제가 잇달아 제위를 이어 로마 제국 전역에 평화와 번영이 계속되어 이른바 ‘로마의 평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로마인들의 경제활동도 활발해져서 멀리 인도의 향료나 중국의 비단 등이 들어오게되고 제국령 각지에 많은 도시들이 건설되어 번성했다. 이 시기에 로마 문화가 크게 발달해 황금기를 맞은 것도 이러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의 평화와 번영은 격심한 빈부의 격차, 중소농민층의 몰락, 빈민의 로마시로의 집중, 노예제도의 위기 등 공화정 말기 이래 로마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모순들이 해결된 바탕 위에 이룩된 진정한 평화나 번영이라기보다는 그러한 모순들의 표출이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과 교묘한 행정력에 의해 억제됨으로써 유지된 통제된 평화요 번영이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한 이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근본적 대책은 별로 마련되지 않았다. 통치자들은 오히려 시민들의 눈을 사회적 모순에서 딴 곳으로 돌리게 하는 데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속주에서 거두어들이는 막대한 부를 가지고 ‘빵과 서커스’를 달라고 외치는 로마 빈민들의 요구를 달래는 데 힘썼다. 로마는 빈민들에게 곡물을 무상으로 분배해 주고 콜로세움 같은 거대한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들끼리, 또는 이들과 사나운 짐승들이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것을 보여주고, 대욕장에서 목욕과 놀이와 연회를 즐기게 해 주었다. 먼 곳에서 수도를 끌어대어 시민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준 한편, 판테온과 같은 신전, 개선문, 전승기념주 등 거창하고 아름다운 공공건물을 세워 시민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고, 그들이 그러한 위대한 로마 시민들의 한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느끼도록 했다. 이러한 것들은 일찍이 그리스의 참주들이 그 선례를 보여 준 바 있는 민중에 대한 인기정책이었는데, 로마의 문화유산 중 많은 것들이 통치자의 이와 같은 인기정책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 통치와 유지가 이러한 인기정책만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통치자가 군에 대한 통솔권과 속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는데, 이런 통치수단으로 로마가 크게 발전시킨 것 중 하나가 도로였다. 로마는 제국령의 각 요지에 군단을 설치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도로망을 정비하여 이것을 로마에 집중시켰다. “세계의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으며, 로마는 이 길을 통해서 군사력 동원을 신속화하고 공납의 운송을 원활화했다.
로마의 문화 발전
이렇듯 광대한 제국령의 통치라는 엄청난 현실적 과업에 몰두해야만 했던 로마인에게는 문학, 예술, 학문 등 심미적이며 사색적인 분야에 탐닉할 여유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고매한 이상의 추구보다는 냉엄한 현실을 어떻게 이겨 내느냐가 문제였다. 문학, 예술, 학문 분야에서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를 모방하고 계승하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시인으로서는 민족적 서사시 『아에네이스』를 쓴 베르길리우스와 아름다운 서정시를 쓴 호라티우스 등이 나왔으나 다 그리스인들의 시를 모방한 점이 많았다. 역사가로서는 로마가 융성하게 된 원인을 추구한 폴리비우스, 『로마사』를 서술한 리비우스, 『게르마니아』를 써서 퇴폐한 로마 사회에 경종을 울린 타키투스 등이 그리스 시대 역사서술 전통을 계승했으며, 카이사르도 자기의 공적을 기록한 『갈리아 전기』를 남겼다.
한편 그리스의 사상을 로마인에게 보급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은 키케로의 산문과 웅변이었다. 철학 또한 헬레니즘 철학이 유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스토아 학파의 철학이 의지적이며 진지한 로마인의 성미에 맞아 지식인층에 널리 퍼져 세네카, 에픽테투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등 대표적인 사상가들이 나왔다. 과학의 분야에서도 헬레니즘의 전통을 이어받아 플리니우스는 『박물지』를 써서 고대 과학의 성과를 집대성하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중심으로 천문학을 체계화했다.
로마법 대전
법은 군대와 더불어 로마인들이 제국을 통치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로마 제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 가운데 하나였다. 12표법으로 종전의 관습법이 성문화된 이후 재판관의 판례나 법률가들이 내린 해석 등이 법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게 되어 점차 시민법이 발전해 갔으나, 제정기에 들어서는 이러한 시민법에서 차츰 세계적인 성격을 띤 만민법이 형성되어 갔다.
기원전 212년 황제 카라칼라가 로마 제국 내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는데, 이것으로 만민법이 제국 내의 모든 주민에게 공통으로 적용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로마의 법은 후에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로마법대전]으로 편찬되었다.
이 법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첫 번째는 Institutiones(입문)으로 법률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담고 있고, 두 번째는 Digesta(선서)로 다양한 사례와 판례를 수록하고 있다. 세 번째는 Codex(법전)로 전체의 법률 문서를 수록하고 있다.
[로마법대전]은 유럽과 지중해 지역에서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되었고, 중세 시대 이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현대의 법학과 정치 체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문명의 발전과 법체계의 형성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