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발전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그 후계자들이 군사력에 입각한 세계적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을 무렵,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유대에서 태어난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인류애에 바탕을 둔 세계적 교회의 터전을 닦고 있었다. 당시 수백 년간이나 이민족의 지배하에 독립을 잃은 유대인들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가져다줄 구세주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것이 예수였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30세가 되었을 때 구세주로서의 자각을 얻게 되어,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과 예언에 따르면서도, 유대교의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신의 절대적인 사랑을 믿고 따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으며, 신의 나라는 믿는 자의 마음속에 있으며, 또 그것은 최후의 심판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약속했다. 그는 훌륭한 설교자요 교사여서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 속에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그러나 배타적 민족주의자들인 유대교의 사제나 율법학자들은 그가 민중을 그릇 가르치는 자라 하여 미워하게 되고, 민중들 또한 그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들 영혼의 구원을 약속할 뿐 유대인들의 현실적 해방과 번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 점에 실망하여, 그를 오히려 로마 관헌에 고발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다.
마지막 기적의 나타남을 기다리던 한 가닥 기대를 저버리고 예수가 끝내 십자가 위에서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으며, 그의 가르침 역시 그것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후 3일 만에 부활했음을 확신한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그들의 교단을 조직하여 그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예수가 죽기 전에 두려움 때문에 그를 외면했던 제자들이 이제는 죽음을 무릅쓰고 그의 부활과 그의 가르침이 진실임을 증언했다. 그 중에서도 베드로와 바울의 전도와 순교는 그리스도교를 세계적 종교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는 로마시를 중심으로 전도하다 순교함으로써 장차 이곳이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래 유대교의 율법학자이며 헬레니즘의 학자로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바울은 예수의 사후에 계시를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소아시아, 시리아, 그리스, 로마 등지의 이방인에 대한 전도에 전념하는 한편, 그 교리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그 또한 네로의 박해 때 순교했다.
로마의 국교
본시 외래의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이었던 로마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별다른 제약을 가하지 않았다.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게 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로마는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아 황제에 대한 숭배를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에 대한 충성의 표현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도들은 이를 우상숭배라 하여 거절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도들은 은밀하게 자기네들끼리만 모여 그들의 신에게 기도하여 로마인들은 이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이리하여 네로 황제 이래 그들은 거듭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3세기부터는 그것이 본격화되어 많은 순교자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박해를 통해서 그리스도교는 하층시민이나 노예들 사이에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점차 상류층에도 신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각지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스도의 언행을 기록한 『복음서』와 초대 사도들의 행적을 서술한 『사도행전』이나 사도의 『서한』들이 수집되어 신약성경으로 편찬되었다. 이리하여 4세기에 이르러서는 그것은 국가권력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여 콘스탄티누스 재위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설을 그리스도교의 정통교리로 삼고,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는데,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마침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아 다른 종교를 금하기에 이르렀다. 순교자들이 뿌린 씨가 마침내 열매를 맺은 것이다.
로마의 몰락
로마 제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이렇듯 그 세력을 팽창하고 있던 시기에, 이를 박해한 로마 제국 자체의 힘은 오히려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사망하여 5현제 시대가 끝나면서 용렬한 황제들이 뒤를 이어 군에 대한 통솔권이 약화되자 군대가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3세기에 들어와서는 드디어 속주의 군단들이 제각기 그 사령관을 황제로 옹립하여 로마로 진격하여 서로 싸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235년부터 285년까지의 50년간의 이른바 병영황제 시대에는 무려 26명의 황제가 재위했는데, 그 대부분이 군대에 의해서 황제로 추대되었다가 다시 폐위되거나 살해되었다. 한편 군대가 이처럼 그 본분인 군무를 제쳐 놓고 정치에 간여하게 됨에 따라 자연히 방비가 소홀해지고, 그 틈을 타서 북쪽의 게르만족과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 등 이민족의 침범이 잦아져서 로마는 외환의 어려움까지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전란과 약탈, 흉작, 질병 등으로 도시와 농촌이 피폐한 데다가 전비의 증가로 재정이 궁핍해지자 징세액이 늘어나고 악화가 남발되어 시민들의 경제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 중에서도 무거운 세금 부담을 지고 있던 도시의 중산층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으며, 이러한 중산층의 몰락으로 로마 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도시가 쇠퇴하게 되었다. 경제적 변화는 농촌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정복전쟁이 끝나자 새로운 노예 공급의 길이 막힌 데다가 노예노동의 생산성도 떨어지게 되어, 노예노동에 의존하던 라티푼디움의 경영이 어렵게 되었다. 이래서 토지를 분할 대여하여 경작케 하는 소작제가 나타나게 되었고, 종전의 노예나 몰락한 농민들이 소작인으로 되었다. 3세기 말경부터는 이들이 토지에 얽매이게 되어 부자유소작인, 즉 중세 농노와 비슷한 농민이 되었다.
3세기 말엽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군에 대한 통솔권을 되찾고 전제군주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잠시 이러한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는 듯이 보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숭배를 강요하고,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하하는 한편, 제국을 4분하여 2명의 정제와 2명의 부제가 나누어 통치하도록 했다. 그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관료제를 더욱 정비하고, 수도를 비잔티움에 옮겨 콘스탄티노플이라 개칭하고, 또 세수를 늘리기 위해 사람들의 직업과 신분을 고정시키는 등 오리엔트적 전제군주체제를 일층 강화했다. 313년 유명한 밀라노 칙령으로 그가 이제까지 박해를 받아 오던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것도 이미 커다란 사회세력으로 성장해 있던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제국의 통일을 굳히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두 황제의 이러한 노력은 제국의 몰락을 일시 멈추는 데 성공했을 뿐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은 후 약 반세기 동안 제국은 사실상 동서로 분할 통치되어 왔는데,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제국을 양반하여 그의 두 아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제국의 양분은 영구적인 사실로 고정화하고 말았다. 그 후로도 비잔티움을 수도로 한 동로마 제국은 1천여 년 동안 존속했으나,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혼란이 계속 된 끝에 476년에는 드디어 게르만족 출신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