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2 16. 이슬람교의 성립과 무함마드의 가르침 이슬람교의 성립 비잔틴 제국이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빼앗겼다가 다시 되찾은 7세기 초엽에 아라비아 반도 서부에서는 그리스도교, 불교와 더불어 장차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로 발전할 이슬람교가 놀라운 속도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이 무렵 아라비아의 사막지대에는 베두인이라 불린 원시적인 종족들이 유목생활이나 오아시스 농업에 종사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의 북쪽 팔레스타인이나 메소포타미아와의 접경지대, 그리고 서쪽의 홍해 연안의 여러 대상도시에는 이들보다는 높은 문명생활을 영위하는 아랍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특히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 사이의 오랜 전쟁으로 페르시아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교역로가 막히게 되자 홍해 연안의 대상로를 통한 동서교역이 활발해져 이들 대상도시가 번창하.. 2024. 11. 9. 15. 비잔틴 제국의 문화 비잔틴 제국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서유럽에서는 봉건제도가 성장하여 지방분권적인 체제가 퍼져 가고, 로마 교회의 세력이 신장하여 세속권과 맞서게 되었으나,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비잔틴 제국에서는 황제의 권력이 그대로 유지되어 로마 제국 말기와 같은 황제교황주의적인 전제정치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요새로서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서도 침범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 흑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이른바 ‘비단길’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상공업의 중심지로서 중세 최대의 도시였다. 이리하여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거듭되는 이민족들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를 근거지로 삼은 비잔틴 제국은 그 후 천년 가까이 존립할 수 있었다... 2024. 11. 8. 14. 중세 교회의 신장과 타락 중세 교회세력의 신장 중세 사회는 봉건적인 기사 계층에 의해서만 지배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특권신분인 교회 성직자 계층에 의해서도 지배되고 있었다. 기사들이 정치적, 현세적 지배층이었다면 성직자, 즉 신부들은 종교적, 정신적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다. 서양 중세 사회는 말하자면 이들 봉건기사와 교회 신부들의 이중 지배하에 있었으며, 이 두 지배 계층은 상호 제휴하여 함께 성장하고 함께 지배하다가 함께 쇠퇴해 갔다. 기사들의 지배체제인 봉건제가 중세 초기의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성장했듯이 신부들의 사제조직인 교회도 같은 시기의 혼돈과 불안상태 속에서 자라났다. 즉,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에 봉건제가 자리를 굳혀 가고 있을 무렵에 프랑크 왕국과 제휴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서유럽 일대를 그리스.. 2024. 11. 7. 13. 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노르만의 침입 프랑크 왕국의 분열 칼로루스 대제가 죽고 난 후 얼마 안 가서 그의 제국은 다시 분열되고 말았다. 그것은 프랑크족 고유의 분할상속제에 의해 카롤루스의 손자들에 의해 제국의 영토가 분할상속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카롤루스 대제가 남긴 통치조직이 내우외환에 빠져 있던 제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제국의 전 영토를 통치할 만한 강력한 집권체제를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카롤루스 대제가 죽자 그의 아들 루이 1세 재위가 뒤를 이었으나,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자신의 세아들에게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 주면서도 어떻게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제국령을 셋으로 나누어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을 세 아들에게 할당하면서도 두 아우 샤를과 루이가 제위를 이을 장형 로타르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했다. 그.. 2024. 11. 6. 12. 유럽의 봉건제도의 특징 유럽의 봉건제도 유럽은 4세기 말엽부터 10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약 600여 년 동안 내부의 분열과 외부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혼란과 무질서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요청된 것은 안전의 보장과 질서의 유지였다. 그것은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이웃에 대한 방어의 문제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력을 갖춰야만 했으며, 그렇지 못한 자는 힘센 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각지에 무력을 가진 자들이 대두하여 이들이 그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 사실상의 지배자가 되었다.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지배하고 법과 질서가 유지될 수 없는 폭력적인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이들 무사들의 지배체제로 서서히 자라난 .. 2024. 11. 5. 11. 프랑크 왕국과 로마 카톨릭 교회 프랑크 왕국 프랑크족은 여느 게르만족과 달랐다. 그들은 그들의 원주지인 라인강 하류지방을 버리지 않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서남쪽으로 확대해 갔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일찍부터 로마 카톨릭교의 정통파를 받아들임으로써 로마계 주민들과의 융합을 꾀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그 세력을 더욱 확대하여 마침내는 서로마 제국의 부흥까지도 성취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프랑크족의 팽창 역사는 사실 그리스도교 역사가들이 전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의로운 것은 아니었으며, 중세 음유시인들이 동경한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야만과 잔인, 음모와 배반으로 가득 찬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왕국의 역사가 유럽의 역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2024. 11. 4. 이전 1 2 3 4 다음